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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4 사진이 좋군요 (10)
  2. 2010.03.11 놓지만 마라 (11)
  3. 2010.03.04 사람이 아니야 (6)
  4. 2010.03.01 브레히트를 읽는 여고생 (10)
  5. 2010.02.17 찌질한 특기 (6)
  6. 2010.02.11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9)
  7. 2010.01.31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2)
  8. 2010.01.24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10)
  9. 2010.01.10 네, 제 탓이었어요 (4)

사진이 좋군요

2010.04.14 14:56 from morceAu
 

01 사진이 좋군요,


그러자 그가 짧게 답했다.

후보정일 뿐입니다.


아, 하고 나는 다른 무엇을 떠올렸는데

그건 누군가를 찍은 몇 장의 사진이었고

아주 그럴 듯한 후보정을 거쳐

내 생애 최고의 풍경으로 남아버린 어떤 장면에 관한

인공적인 모놀로그였다.


이것이 당신의 사랑이군요,

그러자 내가 짧게 답했다.

후보정일 뿐입니다.



02 나는 낯선 이들을 웃기고 난 뒤 안도하는 사람.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은 수난자들의 질문입니다'라는 알료사의 말에

밑줄 긋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 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김애란  ‡  영원한 화자 中


 

03 죽는 순간 아주 살짝,

 


키가 준다고 생각하는 부족이 있다

안녕히! 나는 찢어진 당신 그림자에 인사한다

심장에 흰 제비꽃 무덤이 돋은 나를

내 그림자는 알고 있고

풀 무덤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안녕히! 당신 그림자의 키를 잰 최초의 여름이

풀꽃처럼 웃으며 지나가는 저녁이다

찢어진 그림자가 사뿐히 공중에 떠오른다

가벼워진 당신 그림자에 드리는 첫 입맞춤,

걱정 말아요 아주 살짝, 키가 주는 것일 뿐

당신은 잘 싸웠어요

잘 사랑했어요

쉼표처럼.

살짝 키가 주는 것

쉼표처럼.

살짝 쉬는 것

 

김선우  ‡  그림자의 키를 재다 中

 

 

04 당신이 내 영혼을 빨대로 빨고 있어요.


안나 아흐마토바  ‡  당신이 내 영혼을 中

Anna Andreyevna Akhmatova. 1889-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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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4.14 15:41

    01번 후보정이 필요없는 사진과 사랑을 위하여...
    02, 03번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한표
    04번! 나의 영혼을 빨대로 빨아준 당신이 있었거나, 있거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이 비극에 저주를...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4.14 21:36

      여인님의 답글에 나는 한표.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19:58

      여인님의 답글에 저도 한표 추가요~ ㅋㅋ
      네네. 후보정이 필요없는, 소용없는, 그런 사진이요.
      그래서 필름이 좋아요!
      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두 분의 댓글이
      얼마나 기다려지고 반가운지 모르실 거예요. 헤헤.
      감사해요 :)

  2. addr | edit/del | reply 봄눈별 2010.04.15 02:01

    글을 세 번,
    다시 읽어내려간
    지금 저의 기분은
    미로에 갇힌 구름이 된 것 같아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19:59

      여러 번 읽어주셔서 영광이에요 :)
      떠다니는 구름이
      미로속에 갇히다니요.. 아, 뭔가 멋진데요?!

  3.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4.15 18:48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 뒷걸음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20:15

      앗, 돌고래님! 저도 그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때로는 뒷걸음치더라도
      마지막까지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저는 좋아요 :)

  4.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4.18 19:15

    영혼을 빨대로 빨다라는 문장에서 왠지 젤리포 같은 것을 빨대로 빨았을 때 뭉텅뭉텅 기분 좋게 들어오는 입의 감각을 떠올렸습니다. ㅋ

    후보정일 뿐이라는 진심과 거짓말의 사이.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20:14

      아, 말캉말캉 젤리포! +_+
      어렸을 때 엄청 좋아했었는데
      그 감각이 떠오르네요. 히히.

      아마도 진심이었으면 하는 거짓말, 이었을 거예요.

  5. addr | edit/del | reply 2010.04.19 21:03

    비밀댓글입니다

놓지만 마라

2010.03.11 19:04 from morceAu
 

01 놓지만 마라, 잡고만 있어,

 

라고 꼭 작년 이때쯤 선배가 해준 말, 잊지 않고 있어요. 우리 학부 때도 친하질 않았는데

사실은 얼굴도 표정도 말투도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인 선배였었는데, 그런 말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네, 놓지는 않고 있어요. 대체 언제 공부할래, 당장 복학 안해? 버럭하실 것 같아서,

전화는 도저히 못 받겠습니다. 그 책 잠깐 봤어요. 정확히는 선배가 쓴 부분만.

그리고 솔직히, 그 책에서 좋은 건 이 부분 뿐이었어요.

 

"모든 사물은 '외로움'을 수식할 수 있다.

개 같은 외로움, 궁서체 같은 외로움,

대통령 같은 외로움, 예수, 석가, 공자, 칸트 같은 외로움,

한반도 같은, 지구 같은, 명왕성 같은 외로움

 

내가 명왕성을 인식할 때 명왕성은 넓고 포근한 우주에서 홀로 뜯어져 나와야 한다.

외로움은 사물의 운명이기보다는, 사물을 홀로 서게 하는 인식의 운명이다.

낚시바늘에 어떤 물고기가 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낚시바늘 자체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고는 어떤 사물도 구별할 수 없기에, 외로움의 반대말은 없다.

그래서 나는 외로울 때마다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안 외롭다."

 

이강하  ‡  <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 바람의 속도로 길을 걷다 中

 


02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철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이영광  ‡  사랑의 미안

 

 

03 풀밭 위의 식사를 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샀다. 이 두권때문에 잔뜩 들떴었는데 집에 와서 한 짓이란,

5회나 못봤던 파스타를 가슴 졸이며 보는 거였다. 그가 묻는다. 그렇게 재밌어? 이선균이 글케 좋아?

응 재밌어! 좋아! 소리만 벅벅 질르는데, 그래도 너무 좋아. 뱉어놓고 아차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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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0

    어머나. 이영광. 이영광. 이영광.
    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합니다.
    그 덥수룩한 얼굴이라니요. 그 사투리.. 다시 듣고 싶고요..
    그 음성.. 아, 정다운 음성과 수줍은 듯한 미소.

    아, 사랑의 미안은 처음 읽습니다. 최근 시인가요. 시가 좀 달라졌네요.
    참 반갑습니다. 좋은 시 올려줘서 고맙습니다. :)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3.12 16:45

      그의 시는 좀.. 뜨겁다기 보다는..
      상처받은 곰이 쓴 것 같이..
      좀 처연하고.. 수더분하고 그랬는데..
      시가 좀 달라졌네요..
      근데. 참 좋네요. 그가 달라진 것이.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20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시를 보았습니다. 본래 어디에
      발표된 작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구요..
      저는 이 시를 보고서 이영광 이라는 시인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전작들을 찾아서 보게 된 케이스죠.

      아, 상처받은 곰이라니요..
      그의 전작들을 보며 떠올린 게
      덥수룩하고 수더분한.. 그런 이미지였는데
      아주 적합한 표현인듯 해요. 하하.
      이 시가 자아님께 기쁨이 된 것 같아서
      저두 흐뭇해요 :)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1

    박민규는... 늘 중반 이후에 흐지부지 되는 경향이 있어서 장편은 별로 안 좋아라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2

      박민규는 단편이 너무 좋아요.
      이 책은 발췌된 문구를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좋아서
      충동 구매했어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6

    이영광에 흥분에 쭈르르 답글을 네개나 달다니. 흑.. 죄송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0

      아하하.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반가운 걸요 :)

  4. addr | edit/del | reply ronyc 2010.03.15 13:03

    제게도 이선균은 '그 정도로 너무 좋다'고 외쳐도 당당히 좋은 이. ㅋㅋㅋㅋㅋ
    제 친구는 자꾸 이선균은 웃을 때 드러나는 선홍빛 잇몸이 지나치다며 제 사랑을 잡치네요. 뭘 모르는 것. 쳇.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5 20:46

      그렇잖아도 올리신 사진 보고 반가웠습니다. 히히.

      친구분께 제가 감히 이런 말씀 드리면 안되지만
      뭘 모르시는 군요. ㅋㅋㅋ
      그가 간간히 잇몸이 드러나게 웃는 날이면
      아, 온세상이 다 웃는 것 같아효 ㅋㅋㅋ

  5. addr | edit/del | reply 수은 2010.03.16 00:36

    언제 저도 모르게 텍큐의 블로그를 다시 여셨네요. :)
    하긴, 제가 텍큐에 근 한달 넘게 좀 소홀하긴 했져.
    전 완전, 박민규빠여요. 민규님은 모르시겠지만. 개인적으로 파반느는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하하하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6 13:07

      수은님의 포스팅을 무척 고대하는데
      목이 좀 늘어난 것 같긴 합니다. 히히.
      박민규빠가 제 주변에 은근 많군요!
      근데 저는 복면쓴 사진 보고 좀 식겁하였습니다.
      저는 좀 심약한 빠입니다 ㅋㅋㅋ
      파반느의 반응이 대체로 약하군요.
      어쩐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

사람이 아니야

2010.03.04 14:38 from morceAu
 

01  사람이 아니야, 그는.


알고 있어? 전혜린의 마지막 편지.

장 아제베도.

나를 살게 해줘.. 라고 그녀는 죽을 듯이

현존하지도 않는 소설 속의 사람에게

말을 했던 거라고.



02 누군가와 만났다가 헤어질 때면, 그녀는 안녕, 하고


간결하게 인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었어, 하고 누군가는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별의 순간을 오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습관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없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들이 너무 무거워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의식적으로 그것을 멀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취향들이

항상 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녀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그의 의견을 부정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얘기했고,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

요구했으며,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구분했고,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 합당한 이유를 찾아냈다.

 

하지만 간혹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아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신에게조차 삼인칭으로 남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순투성이의 그녀를,

당신은 당신 마음껏 채색하고 좋을 대로 기억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정말로, 사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아주었던 단 한 사람이 있어,

'나는 너의 영혼을 사랑했어' 라고 고백해준다면,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황경신  ‡  밀리언 달러 초콜릿

 

 

03 어째서 마음이 아픈 것이냐,

 

아플 이유가 없는데, 아픈 이유를 정의할 수 없는데

아프다고 말할 명목이 없는데

그런데도 쓰고있다,

아프다고.

마음이란 이토록 작위적이어서

작위, 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만큼 뻔뻔하기도 한 것이어서

그 나종의 것도 결국은 작위였다고

그게 내 유언이 될 것만 같아서

나는 또 진심이라고 믿는 이상한 편지들을 쓰면서

 

죽은 척 한다, 실눈을 뜨고서.

 

 

04 예민한 사람이 아니에요

 

한심한 시간도 곧 지나가요, 나는 믿어요.

믿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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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3.05 01:19

    저도 믿어요 .

    02 황경신작가의 글.. 참 좋아요 :) 초콜릿우체국, 재미있게 읽었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5 09:16

      돌고래님, 고마워요 :)
      믿어 줄게요, 믿어 주세요.
      선거 후보자 멘트 같군요. 히힛.

      남다르지 않은 단어로, 사람 마음 들었다 놓는 사람.
      황경신 좋아요. 저는 프로방스 여행기도 참 좋았어요.

  2.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3.05 17:22

    Time will tell..

    저도 믿어요. 믿어줄께요..

  3.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08 12:47

    사소한 통찰력.
    때론 잘라진 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 작가의 글보다도, 그 작가의 글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라낼 수 있는 그 예민함이 때론 너무 부럽습니다.

    저는 황경신이라는 사람처럼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것이지만, 저렇게 느낄 수 있는 사소한 통찰력이 부럽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녀(그)가 느낀 슬픔이나 아픔을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잠시 저의 외로움이나 아픔으로 조금 삭일 수는 있었을텐데...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0 01:59

      사소한 통찰력이란, 사소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그런 통찰력일 것 같습니다.
      저도 몹시 부러운 것 중 하나입니다.

      내가 느낀 외로움이며 아픔이, 누군가의 글을 통해서
      말끔히 정리되는 순간, 분명 그것이
      증폭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보면
      삭여져있더라구요.

01 브레히트를 읽는 여고생의 마음이란 뭐였을까?

 

경비병, 이란 시를 읽는 순간, 불쑥 그애의 노트가 떠올랐다.

첫 페이지에 선명하게 적혀있던, 쿵했던 그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브레히트  ‡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시들 속에선 사랑에의 절박함이, 곧 삶에의 절박함 같다.

삶에의 절박함이, 곧 사랑에의 절박함 같다.

절박하면 사랑 받나, 좀 잘 살아지나?

그거참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사랑도 삶도 절박한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너 절박하지, 절박하잖아? 악착같이 쫓아올 사람만을 인질삼아

온갖 진흙탕으로 끌고다닌다. 가혹한 것은 물론, 비열하기까지 하다.

 

 

02  컬러링이 없어서 잘못 건줄 알았단다.

 

혹독한 여름을 보낸 후, 늘 고르고 골라서 걸어놓던 컬러링을 없앴다.

그런 사소한 일의 이유, 같은 건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내게 사소한 현상이 아니다.

내가 듣지 않을 음악, 타인을 위한 음악, 같은 건 이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라고 결심하자

자연히 상대의 음악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저 빨리 좀 받지, 싶다.

하루아침에 쿨한 인간으로 둔갑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사실은

단 1밀리도 쿨해지지 못한다. 알고 있다.


 

03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황인숙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그래, 죽을 것처럼 피곤할 일도 아니며, 이미 윤기를 잃은 지 오래인 것도 안다.

그런데도 기어이 활자로 박힌, 두렵다, 세 글자를 읽어야만 

生은 나만 두려운 것이 아님을 숙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나, 조금도

숙지하지 못한다. 원고는 안 끝났고, 딴짓하고 있고, 밖에는 비내리고,

비오는 날엔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려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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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9) 2010.02.11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2) 201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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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01 14:52

    저는 브레이트의 시보다 희곡을 더 좋아해요.
    황인숙의 시는 언제 읽어도 좋네요. 조금쯤은 다정하지만. 조금쯤은 쓸쓸한.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0

      저도 극작가로만 알고 있던 때였는데,
      저 시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도 황인숙 시 좋아해요. 발랄하고 쓸쓸한.
      어찌보면 조울증세 같은 시들요 :)

  2.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3.01 15:03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변화를 시도해도 그것을 알아채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 그게 어떤 때는 아쉽기도 하다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못할까봐 전 컬러링 따위는 지정하지 않습니다. 절대 몇백원이 아까워서 그런건 아니구요 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2

      네 어설프게 아는척하며 딴지거는 사람 보다는
      그냥 몰라주는게 좋습니다. 저도 절대
      몇백원이 아까워서 없앤건 아니구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02 09:41

    저는 아직 영시에 익숙하지 않아요.
    브레이트, 이름은 참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최근에 미학에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건데 말이죠.
    분명히 예술과 예술성이라는 것은 현실의 삶과 괴리를 경험할텐데 말이죠.
    글이 절박하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절박하게 글을 쓰고,
    혹은 절박하게 글을 읽는 다는 것. @(*#@&#
    아. 바빠서.. 다음에 글은 이어 쓸래요...-_-;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9

      독일 사람이니.. 영시는 아니지만요, 헤헤.
      마르크스를 좋아하시니까
      브레히트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편견이 좀
      생기는데요 :)

      절박한 걸 쓰고 읽는 걸 좋아합니다만
      현실의 절박함과는 분명 괴리된 것이겠지요
      그 거리가 얼만큼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기까지만.. :)

  4.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02 14:03

    영시는 외국시라는 의미었다고 억지부려봅니다..
    외국시는 어떤 경로로 읽어야 하나요?
    시중에 나온 번역책을 읽는 것인가요?
    번역책이 구하기 쉽나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4:52

      그런 의미로 사용하셨을 거라 생각했어요ㅋ

      요즘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를
      열심히 검색해보면서 저도 했던 생각입니다.
      아, 외국시는 도대체 어떻게 읽으란 말인가,
      하는 좌절의 외침. 소설보다 시는 완전 절벽입니다.
      딱 한권 출판된 번역 시선집은 절판이고
      그나마 인터넷에 몇편 올라와있는 시들은
      오자 투성이고.
      번역서가 잘 나와있는 유명 시인만 골라서
      좋아해야하는 건가, 싶습니다.
      외국어를 공부해서 그 언어로 읽는다는 것은
      평생이 걸릴 것 같고.

      저의 결론은 구하기 쉽지 않다, 입니다.
      그나마 외국 시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소개해 놓은
      책들은 간간히 있어서 그거에 의존해 봅니다.
      외국문학 전공하시는 분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념만 길었습니다. 어흙.

  5.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05 13:10

    브레히트의 시는 그것이 과연 시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한 사람이 침묵보다 더 깊은 독백이었다고 생각하면 시가 아닐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5 17:12

      짧은 가운데 비유가 있고, 내용적으로
      더이상 부연할 것이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시의 형식을 띄지 않아도,
      충분히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찌질한 특기

2010.02.17 18:46 from morceAu

 

 

 

 

 

네스티요나 - 사라지지 않는 밤

 

 

 

01 찌질한 특기로다

 

단지 사진의 문제‚ 였던 것이

어느 새 삶의 태도 문제‚ 로 활활 번져간다

나는 억울하다‚ 고집 부린 적 없다

그렇기에 더 괴로운 것이다

의도가 아니라‚ 감출 수 없는 내 무능력‚ 이므로

 

위험하다

네스티요나를 반복재생해대는 오후

 

 

02  그녀가 썼다, 인격은 행동이야

 

그래 그렇구나, 인격은 물론

때로는 진심을 드러내는 것도 행동이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그런데도 그때 분명 그 사람은 웃고 있었어,

어떻게 속일 수 있었을까? 속인다고 속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던 그 마음들에 경멸을.

 

 

03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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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2.17 19:06

    아아, 심보선이군요. 시 좋네요.. 어찌할 수 없는 소문도 좋았는데.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7 19:13

      심보선의 시를 좋아하세요?
      아, 반가워라 :)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있음을..
      하는 부분이 기억나네요. 정말 좋아요, 그 시도.

    • addr | edit/del 흰돌고래 2010.02.19 20:19

      어찌할 수 없는 소문, 찾아봤어요!
      정말 좋아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9 20:41

      사려 깊으시구,
      부지런하기까지 하신
      흰돌고래님 *_*

  2. addr | edit/del | reply 2010.02.18 17:23

    비밀댓글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9 02:11

      음산함으로 가득한 네스티요나를
      맘에 들어하시다니,
      비슷한 취향 완전 인증!ㅋ

      저도 문단 분위기 같은 거 잘 모르고요
      틀에 박혀있다고 느껴지는 시는
      애써서 읽지 않아요.
      언젠가 와닿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죠.
      다만, 짧게 집중하는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에 가장 마음을 두는 편입니다.

      아, 정말 이 시는 보기 드물게
      아픈 포인트가 곳곳에 박혀있는 것 같아요.
      읽을 때마다 구석구석 아프네요.
      무언가를 같이 읽고 같이 듣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참 위로가 돼요. 고맙습니다 :)

 

01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예담,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27p.

귀를 자른 일로 고갱이 동생 테오에게 연락했다는 걸 알고서

고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리고 퇴원 후 고갱에게 편지를 썼다.

모든 일이 늘 좋아지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 악의는 없었다는 걸 알아 달라고,

고흐의 유언처럼 생각되는 말. 그때 그의 세상에선 모든 일이 얼마나 좋아지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조롱한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의 세상은 멋진 세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이 가벼워지질 않는다.

 

   

02 내 집 낡은 뻐꾸기시계는 제 울음의 횟수가 따로 있다

 

밤 한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스무 번 깨어 울거나

아홉시에 달랑 한번만 탁, 침 뱉고 들어가거나

다음날 정오엔 절마다 동백꽃 속에 빠진 채 아예 잠잠하거나


나 또한 나만의 눈물의 횟수가 따로 있으니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

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

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


스무살에는 서른을 대고

서른엔 스무살인 척했거니

첫눈에 눈물의 횟수를 알아맞힌 그 새와 나,


번번이 땅에 떨어지는 얼굴이며, 다음날 약속을

전날에 나가 자처하는 이별 통첩이며, 내일의 줄거리를

다 발설하고 마는 어제 따위까지


다른 시간들은 다 아무래도 좋았다


김경미  ‡  눈물의 횟수


 

03 이석원의 산문집에 인명색인이 있어 놀랐다.

 

거기에 황경신이 있어서 좋고, 고흐가 있어서 좋고, 전경린이 있어서 좋고,

왕가위와 이소라가 있어서 좋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어서 좋았다.

 

 

04 왜 자꾸 한숨 쉬는지, 궁금해?

 

이건 꽤 오래된 습관인데 말이야

있지 나는, 설레기 전에 아픔을 연습해,

그러고 나면 절대로, 아픈 일이란 일어나지 않아

내가 가진 유일하게 좋은 습관일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그걸 빼먹는 순간, 끝장인 거야.

 

 

05 잠깐만 한 눈 팔면 사라져버리는 물건;

 

똑딱 볼펜, 딱풀, 포스트잇, 손톱깎이, 귀이개, 안경닦이, 젤 좋아하는 양말, 모든 무료 쿠폰,

USB 뚜껑, 귀걸이 한쪽, 머리 묶는 고무줄, 충전용 건전지, 식염수 병, 오래전의 편지, 지하철 노선도,

도장, 몇 개 남았을 두통약,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A4용지, 통화중에 휘갈겨 쓴 전화번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여배우의 얼굴, 짝사랑의 상대, 별똥별, 집중력,


그리고 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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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12 00:16

    보라색 글씨도 참 좋아요 님 ! 꺄웅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2 00:58

      이 세상에 좋아하는 게
      느무느무~ 많을 것 같은, 흰돌고래님!
      초면에 귀여우시다고 써도 되나요? >_<
      흰돌고래님 댓글 덕분에
      사라져버린 명랑을 단숨에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고맙습니다. 히히.

  2.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12 00:19

    여기 색이 참 좋아요. 자주빛, 초록빛 . . 옆에 꽃을 든 사진이랑 아래에 빨간 물고기들도요. 저는 노란 물고기인데^^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고흐, 고흐, 고흐 T*T
    아무래도 오늘밤 고흐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
    (저도 반고흐, 영혼의 편지가 있어요. 그림책이랑요. 헤헤)

  3. addr | edit/del | reply 엘군 2010.02.12 00:20

    잠깐만 한눈 팔면 사라지는 것에는,

    정신,

    이 있지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2 00:59

      아, 그것이 있었군요.

      그걸 빼먹다니
      제가 또 한눈 팔았나봅니다ㅎ

  4.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2.13 16:45

    황경신, 고흐, 전경린, 왕가위, 이소라...
    어쩜 슈풍크님과 저랑 취향이 같을까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슈풍크님에게 끌렸었나봐요.
    아, 표현이 조금 느끼한가요..

    슈풍크님, 설 명절 잘 보내셔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3 21:44

      클리티에님, 뭐 그정도의 느끼함이라면
      기꺼이 즐긴답니다. 푸하하.
      저의 문화적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사실 오프라인에선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어서
      더 반가운 맘이에요.

      클리티에님도 즐거운 설 보내세요 :)

  5.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2.14 01:53

    1. 고흐, 영혼의 편지.. 그 책 저도 졸라 좋아해요ㅠㅠ 도서관에서 빌려읽고서, 다 읽은 책을 서점에 보이기만 하면 소장용으로 살까 늘 망설입니다.ㅜㅜ/으아유 ㅠㅠㅠ
    4. 전.. 그냥.. 평소에..보통...졸라졸라 잘 설레는 타입이랄까... 연습은? 그런건 없는듯..요.
    5. 딴건 몰라도, USB뚜껑만큼은 강력히 공감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4 21:39

      1. 저는 여러 번 읽은 책을 누구 줘버려서,
      개정판으로 또샀어요. 왠지 옛날 것이 더 좋아요.
      4. 실전에 자신없기 때매 연습은 열심히 합니다ㅋ
      5. 심지어 유에스비 잃어버리고 뚜껑만 남은
      뷁스러운 경우도.. 하여 최근에
      뚜껑이 따로 없는 디자인으로 구입했습니다.
      꼬뮌님께도 강추합니다ㅋ

  01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보면 걸다보면
 

  시월과 십이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병률  ‡  기억의 집

 

 

  02 어떡하고 사는지 궁금했나요?

 

  내 글속에 언뜻 당신이 보여서, 왠지 모를 존재감이 느껴지나요?

  하지만, 아직도 내가 좋나요?

  라고 물으면 질겁할 거면서. 하하하. 농담. 농담이 너무 하고 싶네요.

  농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아주 무례한 농담을.

 

 

  03 누가 뭐라 생각하든, 쓰고 싶은 걸 쓰면 되지, 라고 스스로를 주입식으로 교육한다.

 

  이게 과연 쓰여질 필요가 있는 것인가, 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쓸 이유가 없어지니까.

  마음 속에 새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쇼핑이 하고 싶다.

  7만 6천원이라거나, 9만 2천원이라거나 하는 가격표들을 집중해서 읽고 있으면,

  이 구차한 기분도 깔끔하게 수치화될 것 같다. 너무 비싸군. 하고 내려놓으면 이상 끝.

  이상 끝, 이면 좋았을 미뤄둔 일의 목록 원투쓰리포.

  기어코 일요일 밤을 꼴딱 새려고 커피 두잔째 원샷해주시고.

 

 

  04 자정 이후 감상 자제 리스트 추가

 

  데미안라이스 9 crimes 뮤비.

  의미를 생각하기 앞서, 그여자 얼굴이 꿈에 나올 것 같아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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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2.01 09:01

    이병률 시인.. 시 아름답군요. 이 시인의 다른 시들이 궁금해집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1 13:17

      시인이자 방송작가이면서, 사진도 좋고 여행글도 좋고..
      제게는 '엄친아' 격이신 분ㅋ
      그의 시들은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의 균형을
      아주 잘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느낌으로 이성복, 김경미 시인이 떠오르는..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2010.01.24 20:20 from morceAu
 

01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까요, 공효진이 푸념을 했다.

 

그러자 마주 앉은 여자가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거, 물 맞거등.

그 순간 <파스타>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결심하였다. 간만에 보는 명랑한 드라마.

미실을 떠나보낸 이후로, 기나긴 사극을 볼 지구력을 상실했다.


 

 

02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진은영  ‡  긴 손가락의 詩

 

근래에 알게 된 시인 중에서 무척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각별한 애착을 두지 않았던

진은영의 시들이, 부쩍 좋아진다.

 


 

03   오, 라는 외마디는 어쩜 이리 씨니컬하고도 호들갑스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폴의 노래 가사를 놓고, 네가 망친 폐허를 보렴, 오, 사랑, 이라고 장난쳤던 날이 생각나 마음깊이

반성했다. 그나저나 <여배우들>에서 오, 사랑이 흘러나왔던 그 타이밍은 참으로 뭉클하였다.

근데 분위기 깨서 정말 미안하지만, 중간에 가사 틀렸다, 가사 틀렸다,, 혼자서 막 이러고.


 

 

04   지난달 상선생님께서 음주 중에 그려주신 초상화는

 

배낭에 넣어둔 그대로 손바닥 만한 크기로 여러 번 접혀있다. 표구를 하려고 매번 마음먹지만

매번 그대로 접어둔다. 선생님, 이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표지로 써도 좋을법한 초상화예요,

라고 말한 것이 무척이나 민망하게 생각되어서. 낙관까지 찍어주신 그 그림을 쓰게 될 날이

오기는 올까. 추천하신『헤겔 미학』부터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05   왜 하필? 이라고 물은 사람, 현재까지 무려 3人.

 

듬직한 아이돌 다놔두고 왜 하필? 이라니! 오기가 발동한다.

그렇다면 더욱더 열렬히 사랑해주지.

나는 깝권이 좋다아~

 

 

 

06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궁극적으로 먹고 싶은 게 뭔데? 우습지 않은가, 돼지껍데기라니.

내 블로그의 이름은 궁극의 돼지껍데기야.

 

참 여지도 없으시지. 나는 지지않고 대들었다.

지금까지 선배 패러디 중에 최고로 모욕적이예요! 그러자 답이 왔다.

그게 바로, 기획의도야. 껄껄.

흥. 정말로 그런 블로그를 만들까봐 나 사실 살짝 쫄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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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01:55

    글쟁이들은 언제나 부러워요.
    왜냐하면, 글을 잘쓰니까요.
    또 왜냐하면, 흠.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6:26

      생략하신 두 번째 이유가
      몹시 궁금합니다.
      뭔가 반전이 있을 것 같은..

  2.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16:55

    두번째 이유는..(만족스러운 반전이 못될 것 같아 안타깝지만,)
    바로, ‘글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7:34

      아, 밥이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로 생활을 유지해나간다는 것..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1.27 17:00

    진은영 님의 시. 가슴 한 구석이 '덜컹!'하네요.
    나도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1

      다른 시들도 다 좋지만,
      그녀의 시론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내게서 가장 멀리 자라나있는 손가락의 끝으로
      아, 멋진 걸 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4.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1.27 17:24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 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 까요'
    그거 물이 맞거든 했지만,

    술일 때도 물처럼 싱거운 순간도 있잖아요.

    감정의 동요를 불러 일으키게 글 잘 쓰시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7

      에구, 과찬이세요.
      감정의 동요! 그런거 제가좀 좋아합니다 :)

      근데 정말로 술이 물처럼 싱거울 수가 있나요?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는ㅋ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9 03:27

      아, 칭찬 감사합니다 :)
      한때는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을 때
      저말이 무슨 말일까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도둑이 제발 저리듯..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거나
      허황되게 꾸며댄다거나,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거나
      그런 의미로 들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에 와선
      진.심.으.로. 감사해요.
      저란사람이 뭔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은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술이 싱겁게 느껴질 만큼
      쓰디쓴 인생의 맛을 알게 되더라도,
      감수성 있는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ㅎㅎ

    • addr | edit/del 고무풍선기린 2010.01.29 13:19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신 것 같고,
      그 감수성이 글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래도 술의 쓴 맛을 느끼지 못할 떄가
      있었던 걸 보면,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싱겁다는 말은 과장일 테구요.

네, 제 탓이었어요

2010.01.10 16:27 from morceAu

 

01   네, 제 탓이었어요.


그녀는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지만
그 눈길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거든.
흉터를 얻게 된 사연은 결코 잊을 수 없지,
안 그런가?

 

코맥 매카시  ‡  모두 다 예쁜 말들

 

 

 

02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들을 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짐작했으니까.

이제는 경정산만이 남은 이백에게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리워라는 말에는 지금 내게 당신이 빠져 있다는 뜻이 담겼다는 걸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호-야레호-,

내게는 이제 경정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까. 호-야레호-,

당신도, 그 어떤 사람도 결국 그럴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도넛과 같은 존재니까.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김연수  ‡  청춘의 문장들, 서문 中

 

 

 

03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 대로 말하는 것과 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桃花)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 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 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볕에

얼마나 바래서 백설(白雪)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 가도 마음은 붉어 갑니다.

피는 식어 가도 눈물은 더워 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바다엔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한용운  ‡  거짓 이별

 

 

 

04  이거참, 무슨 증세인지

 

아래 마감선을 가지런히 맞춰야 직성이 풀리니,

내용이 짧은 포스팅을 하고나면 볼 때마다 자꾸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세 페이지에 나뉘어 있던 글을 한 페이지로 합쳤다.

덕분에 폴더의 성격을 약간 수정하게 됐지만,

그래도 좀 정리가 된 듯한 기분..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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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0.01.12 10:57

    비밀댓글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2 13:13

      아, 우리들은 증거가 필요해요.
      시간, 이라는 범인은 끝까지 도주하겠지만요..

  2.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14 10:47

    살갗에 선명한 흉터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상처는 언제나 충분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4 11:06

      '충분하다'라는 말씀에 공감해요.
      더 어그러지지도, 더 나아지지도 않으니
      언제나 남거나 모자란 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흔적 반갑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