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mnésie'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0.04.04 당신은 내 생각을 조금도 않지만 (7)
  2. 2010.03.30 손을, 찍다 (6)
  3. 2010.03.26 しろ (4)
  4. 2010.03.16 소멸을 꿈꾸는 이면지 (6)
  5. 2010.02.26 천박해질 권리 (5)
  6. 2010.02.20 꿈에서 온 트랙백 (16)
  7. 2010.02.16 20050902 날씨맑음 (10)
  8. 2010.02.03 여행하는 남자 (4)
  9. 2010.01.20 살겠다,
  10. 2010.01.17 망각의 첫 순서 (14)
0
 

 

 

 

 

 

 

 

 

 

 

 

 

 

 

 

 

 

 

 

 

 

 

 

세 개의 벽과 두 개의 문 뒤에서

당신은 내 생각을 조금도 않지만

하지만 돌도 더위도 추위도

또한 당신도 막을 수는 없지

내 맘대로 내 속에서

마치 계절이 오가며

땅 위에 숲을 만들듯

내가 당신을 부쉈다 다시 맞추는 것을


Jules Supervielle. (1884-1960)

 

 

 


H. 나는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함축한 이니셜이 되었을까.

생략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의 내 마음에는.

다시는 부연 설명될 수 없는 것들, 세세히 풀어낼수록 초라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다시는 당신을 쓰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한다. 어쩌면 그 약속을 깨기 위해

나는 이 자발적인 유배를 택했을 것이다. 때로 추억에서 힘을 얻는다. 그런 뒤에는

절망도 역시 얻는다. 부쉈다 다시, 부쉈다 다시, 그렇게 얼기설기 맞춰진 당신의 조각들은

흉물스러워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손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결국 안고갈 수밖에는 없음을 안다.

세 개의 벽과 두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구조의 방을 생각한다.

아무리 반복해서 그려보아도, 두 개의 창이 달린 바닥이 없는 삼각뿔. 이다.

존재하지만 사람이 머물 수 없는 방. 꿈속에서 푹.. 하고 두발이 허공으로 꺼질 때,

나는 겨우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내가 아직도 바닥없는 그 방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꿈일 것이다. 그 안에서 내가 웃고 또 내가 운다면, 그것 역시

내손이 부쉈다 다시 맞춘 웃음이고 울음일 것이다. 세 개의 벽과 두개의 문 뒤에서

당신은 내 생각을 조금도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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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4.05 11:38

    글이 참 좋네요..
    ...쓸쓸합니다.. 제 마음이 말이예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06 16:27

      쓴지 좀 된 글인데, 저역시두 쓸쓸했었습니다.
      각자의 마음이지만, 가끔은 비슷하게 쓸쓸하기도 하여서
      위안이 되나봐요. 고맙습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봄눈별 2010.04.06 01:29

    아...맥주라도 마실까...봐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06 16:29

      아...맥주라도 마실까 싶은 새벽 1시 29분의 기분을요,
      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맥주를 잘 마시지 못하는데도요.ㅋ

  3.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4.06 13:53

    그러게 말이예요. 우리가 아는 사람들은 다 내가 부쉈다 맞춘 그런 사람들일 뿐인데...

    그런데 일말의 가능성은 세개의 벽 뒤과 두 개의 문 뒤의 그 사람도 열심히 슈풍크님을 부쉈다 맞췄다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06 16:32

      정말 그런 걸까요. 우리 모두는
      벽과 문을 사이에 두고 앉아 각자의 레고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건가요. 그게 참 이상스럽게도 단란하고 귀엽고
      그리고 덧없습니다.

  4. addr | edit/del | reply 파천 2010.06.09 01:00 신고

    아름다움에 대한 진지함,,,혹은 그런것에서 부터의 외면,,덧없음에 대한 한가닥,,,미련,,그런 것,,,

손을, 찍다

2010. 3. 30. 19:32 from paRamnésie

01

 

 

 

 

 

 

 

 

 

 

 

 

 

 

 

 

 

 

 

 

 

 

 

 

 

 

 

  손을 찍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된 습관이야

 

  우연히 펼친 어느 잡지에서 방송작가 송지나의 손을 봤을 때,

  인터뷰를 하면서도 얼굴을 보이기가 부끄럽다고

  겨우 실려있던 단 한 장의 사진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그냥 그의 손이었어, 그런데 그 빈 손에서

  그 사람 전체가 보인다는 느낌, 처음이었어

  그 이후로도 나는 송지나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알려는 마음도 들지 않았어, 그손이 말해준 것으로

  내게는 충분했으니까, 말이야

 

  이 편협한 습관이, 올봄 이렇게 당신 손을 찍게했구나

  뽀얗지도 않고 길이도 짧다고 늘 당신으로부터 구박만 받는 당신 손이,

  내 손등의 오래된 흉터를 안타까운 듯 덮어주던 당신 손이,

  나는 너무 좋아, 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워, 당신 손을 잡는 대신

  말없이 당신 손을 찍는다, 도대체 뭘 그리 찍어대는 거야? 라고 당신이 물어도

  마냥 웃으며 셔터를 누를 뿐이었는데,

  그 순간 내 손등의 흉터가 살아나기라도 한듯 징.. 하는 쓰라림을 느꼈어

  그건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한다해도 이해할 사람이 없겠지

  그러니 당신에게도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 게, 그냥

 

  당신이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그것으로 내가 더불어 웃게 되는 것,

  거기까지만 말해도, 당신은 알 테니까

  당신 손이 당신 전체를 말하 듯이.. 이 글이 내마음 전체를 말해줄 테니까..

  점자를 읽듯 우리가 서로에게 읽어낸 어떤 말들을

  흉터를 가진 손등이, 땀이 밴 손바닥이, 손끝의 지문이

  나보더 더 오래 기억해줄 거라 생각하니, 아 이토록 나는 기뻐

  긴장이 배어있는 당신의 저 손, 오래 기억할 게

  훗날 당신과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있게 되더라도

  약속해, 잊지 않을 게, 나를 붙들어준 당신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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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30 19:50

    참으로 진지해보이는 손입니다.

    면접을 보는 것 같은 자세의 손, 아니면 상대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헛몸짓을 제어하려는 듯 몸에 자물쇠를 건듯한 손입니다.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3.30 22:28

      여인님. 답글이 아름답습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01 11:43

      아, 정말루요. 믿고싶어지는 댓글입니다.

      때로는 그 진지함이 당황스러울 만큼요,
      숨막히게 진지하지요.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요.
      오직 듣기 위해 자기를 제어하고 앉아있는 사람,
      정말로 그렇다면, 아 멋진데요 :)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30 22:28

    단정하고. 기름끼없이 건조한 남자. 근데 잘 웃는 남자일 것 같네요.
    손가락이 반지.. 임자가 있군요. 하하.
    이분 목소리 좋은가요? 아마도 목소리가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01 11:49

      혹시 그를 아세요? :)

      단정하고. 느끼한 말 같은 거 못하고.
      그런데 저보다 잘 웃고요.
      목소리도 나름 괜찮은.. 히히.

  3. addr | edit/del | reply 녀름 2010.04.25 00:13

    참 단정하네요. ^^

しろ

2010. 3. 26. 01:17 from paRamnésie

0

 

 

 

  그것은 나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아니 사실은

  마지막 이름,

 

  이었습니다, 해가 지는 이 즈음이면 언제나 슬펐던 마음의

  실오라기를 기어이 찾아내어 주욱.. 당기면

  그 장난스러운 절망의 니트는

  올이 다 풀려 형태를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고운빛깔의 실뭉치를 굴리며

  고양이처럼 몹시 골똘히 투욱하며 떨어지는 그 순간을

  겨누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러나 투욱 떨어지는 그 순간,

  은 고양이에게 한낱 장난의 오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이 시로야

 

  하고 불렀을 때 그것은 장난도 무엇도 아니라

  아주 예쁘게 짜여진 스웨터의 팔꿈치처럼

  그 팔꿈치의 다정히 늘어난 라인처럼

  제법 구체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다시 시로야

 

  두번 불렀을 때 그것은 소리도 무엇도 아니라

  이미 그곳에 아주 낮고 낮게 깃들어있던 검은 목소리의 한기였을 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그 누군가를 기어이 목졸라 죽일 때에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며, 이 즈음이면 언제나 슬픈 생각이 들어요,

  화석처럼 굳어버린 입술을 벌리고 흘러나왔다 사라져버리는

  회색빛의 때를 잔뜩 묻힌, 시로, 한때는 눈부시게 희었던 죽은 고양이의 환영

  일 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나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아니 사실은,

 

 

 

 

 

 

                     어른아이 - Sad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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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엘군 2010.03.26 01:55

    짙은, 아주 짙은 보라색을 보고 싶네요.
    슈풍크 님의 글은 그래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29 10:33

      그런 빛깔을 좋아합니다. 제글이 그런 빛깔을 닮았다면
      저에게는 기쁨이예요! 고맙습니다 :)
      엘군님 블로그에 가끔 들르는데,
      제 컴터가 버전이 낮은지 제대로 보이질 않더군요.
      뭐가 문제인지.. 슬퍼요 ㅠㅠ

  2. addr | edit/del | reply 봄눈별 2010.03.26 15:04

    이미 그곳에 아주 낮고 낮게 깃들어 있던 검은 목소리의 한기,
    라는 부분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어요. 한참 동안이나,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떠올랐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29 10:36

      아, 그리운 사람들이요..
      그리움은 분명 뜨거운 마음일 것인데,
      왜 떠오르는 그들 목소리의 이미지는
      그토록 검은 한기로 가득했을까요..

소멸을 꿈꾸는 이면지

2010. 3. 16. 13:17 from paRamnésie
 

이면지라니, 당치도 않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원고를 써대고 출력하고 폐기해왔다.

사실 소모적인 작업이며, 일이 끝나면 원고는 버리는 게 상책이건만

바로바로 버리질 못하고 꼭 엄청나게 퇴적된 후에야

어쩔 수 없이 내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거사를 감행한다.

그러니 늘 엄청난 양이다. 세상에나, 종이가 아깝다.

이 시답잖은 토너 자국을 위해 늘 소모해온 삶이기에

종이 아까운 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내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원고에 사용한 종이에 있어서, 이면지란 없다.


뒷면은 깨끗했다. 분명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찢는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세로로 찢은 후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서 깍두기 썰듯이 조각조각 찢는다.

양이 양이니만큼 찢는 손도 아프다. 가장자리에 손을 베는 일도 생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상상한다.

누군가 출력한 서류를 읽다가 우연히 그 뒷면의 글자들을 발견한 후,

뭐에 홀린 듯 이면지 상자를 뒤져가며 그것을 구독하고 있는 상황을.

끔찍하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개인적인 소설을 훔쳐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이면지를 읽고 있던 내 자신을 생각하니

그 친구와 절대로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니 이면지를 읽었어, 그 이면의 이야기가 좋았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면지에서 본 이야기, 이면지에서 본 누군가의 마음,

이라니 말이다.

이것이 어떠한 상황인지, 나는 피부로 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나라는 사람이 그의 노트 한가운데 씌어져 있기를 바란 적은 없다.

행여 그럴 리도 없겠고.

하지만 그에게 소중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그 이면에 말이다.

무심코 한번 뒤집어 보았더니, 거기에 내가 있다고 말이다.

그 이면지의 여자를 말이다.


차라리 찢어라, 쭉쭉 찢어버리고

거기에 다른 무엇도 다시 출력하지 말아라. 라고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면지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찢어버리지 못한 것은 나였다.

그는 나를 찢었을까. 아니면 아주 그럴듯한 문서의 뒷면으로 재활용해 주었을까.

지금도 이면지 상자 속에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이글을 쓰고 출력한 뒤에 한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이면지 통 앞에 서서 보란 듯이

뒷면이 아직 깨끗한 이 종이를 쭉쭉 찢을 것이다.

완전한 소멸을 집행하는 손동작에는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다.

그것은 심지어, 경쾌하다.


이면지라니, 당치도 않다.

 

 

 

 

 

 

 

조원선 - 아무도,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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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16 13:28

    이면지를 찢는 슈풍크님의 손은 길고 차가운 흰빛일듯...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17

      찢는다는 행동은, 그런 손에게 참 잘어울리네요.
      그런데 참 어울리지 않게 제손은 늘 뜨겁고
      길다란 손가락은 이상해보일 지경이고요..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7 21:34

    이면지의 여자. 시로 한번 써보세요. 읽고싶네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20

      비슷한 제목의 것을 쓴적이 있어요.
      아주 짧고 조악한 것이었어요.
      자아님께는 정말 멋지게 써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꼭 그러고 싶어요 :)

  3.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18 09:37

    좋아하는 시를 인쇄하고,
    그리고 버린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시를 왜 버리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저는 그것들을 버리면서,
    누군가가 시를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가 단지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제가 쓴 시라면, 그리 하지 못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27

      '누군가가 쓴 것'과 '내가 쓴 것'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겠지요.
      완벽히 같은 단어나 문장을 쓴다고 해도요.
      두개는 완벽히 같아질 수가 없어요.
      남의 것은 함부로 찢을 수 없겠지만
      제것이니 찢을 수도 있고요.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게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에선 없어지지 않고요.

천박해질 권리

2010. 2. 26. 03:42 from paRamnésie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수잔 손탁  ‡  타인의 고통 中

 

 

 



 

 

 

 

 

 

 

 

 

 

 

 

 

 

 

 

 

라디오는 어때? 라고 당신이 물었을 때

그 화창한 봄의 수목원에서요,

매일매일 빨고 또 빤 빨래를 색이 다 빠질 때까지

유한락스에 손이 삭아서 없어질 때까지 문대고 있는 기분이에요, 라고 내가 말할 때

당신 손엔 수잔 손탁의 책이 들려 있었지요. 재밌어요, 그책?

고통인데, 재밌을리가. 그래봐야 타인의 것이잖아요.

그리고는 꽤나 짜증스런 선문답이 이어졌는데, 내가 했던 말도 당신이 했던 말도

기억에 없어요. 당신은 꽃들 속에 지친 듯 앉아있었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도 사진을 안 찍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봄이 너무 휘황하여 그랬나요?

그 봄이 또 오려는지 오늘은 날이 따스했지요, 이제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이것은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 일 뿐이라고요.

미안하단 말 듣기 싫고, 무력하단 말은 더 듣기 싫고

그냥 읽지 않을 책의 목록이 좀 더 생겼습니다, 라고요.

말하건대 수잔 손탁은 읽지 않겠어요, 아무와도 수잔 손탁에 대해선 이야기 않겠어요.

이것이 당신에 대한 내 애정과 환멸과 고통에 대한 맹세라면 코웃음 칠 건가요?

그래도 다행인 건, 다시는 수목원에 안 가겠어요,

라는 말은 죽어도 못 하겠네요.

무엇을 잃어도 아 수목원에는 가고 싶어요, 어서 장미가 피어서,

그 화려한 것들을 차마 찍지는 못하고 보고만 싶어요,

느리게 지나는 오후 내내, 넋을 놓고. 천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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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2.26 10:21

    지금의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환멸과 분노를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저는 ㅠ.ㅠ
    까짓거. 그냥 미성숙한거 인정 ! 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6 20:28

      지금의 여기에서는, 성숙이 성숙하지 못하고
      미성숙이 미성숙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박함이나 탐하고 있는 것이 참 부끄럽네요..

    • addr | edit/del 느림보 2010.02.27 09:39

      사실은 수전 손탁을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고 하는게 맞겠죠. 이사람 책을 사게 된것도 얼굴에 반해서 샀으니까요.

      간혹 글이 안풀릴때 읽는 책들이 있는데, 손탁의 책이 그렇습니다. 명문이라기엔 좀 뭤하지만, 기능적이고 명료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글을 쓰고 싶은데 말이죠. 생각이 너무 많아요. 오대수씨랑 비슷하게. 그럼 나도 5 년간 군만두 철창에 가야할까요. 흙.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7 11:22

      제가 르 클레지오 책을 산 이유와 비슷하군요. 하하하.

      저는 뭐랄까, 엄격함이 느껴지는 작가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의미나 다른 이미지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압도적인 느낌을요.
      맹세는 맹세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이고,
      좋은 글에 대해선 앞뒤 안가리고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상상을 하지 말아봐, 라는 오달수씨 대사가
      음성서비스로 ㅋㅋㅋ
      군만두 말고 산낙지를 드셔보심이..
      그리구 오대수씨정도 명료해지시려면,
      똑같이 15년 정도는.. ㅋㅋㅋ 죄송해요.

    • addr | edit/del 느림보 2010.02.28 09:45

      앗. 손탁은 엄격하지 않은데. 저에겐 거의 여자 아이돌입니다. :)

꿈에서 온 트랙백

2010. 2. 20. 22:16 from paRamnésie

 

 

 

 

 

 

 

 

 

 

 

 

 

 

 

 

 

 

 

 

 

그러니까, 안녕,

 

어젯밤엔 꿈많은 얕은 잠이 왔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나는 웃었습니다

한 순간도 울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꿈에 있는 동안, 바람이 불고, 나는 뿌리없이 흔들리고

뿌리가 돋아 그 뿌리가 뽑힐 때까지 흔들리고

그러고도 나는 웃었습니다

 

얼굴도 없는 당신이 내게 말했었습니다

넌 일생 미움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것은 사랑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거와 같았어,

순간 그곳은 호수가 되었습니다

저기, 쉴새없이 자맥질하는

오리가 보여요,

 

쏴버리고 싶다, 라고 생각하자

내꿈의 전지적작가가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총을 가져본 적이나 있었니,

너의 영혼은?

라고 말하자 참지 못하는 것은

내 영혼입니까, 오리입니까, 내 가져본 적도 없는 빈총입니까

 

방아쇠를 당겨본 일 없으나

나는 알고있습니다, 자각몽을 꾸는 자에게

총 따위는 필요 없어요,

자맥질하는 오리의 젖지 않는 꽁지털 빛깔이 곱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것들이 내가 한껏 탐낸 꿈이었으니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꿈은 끝나게 되어 있으니

 

그러니까, 안녕,

이라고 나는 말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안녕,

숱한 내 에필로그들

에필로그의 에필로그들, 의미도 없이 반복하여

그러니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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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20 22:25

    아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노래 - so good bye . 좋아하는 노래에요 -
    슈풍크님, 저는 왜 이 글이 좋을까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0 22:34

      꽤 지난 노래지만,
      계절마다 한번쯤은 듣곤하는 노래예요.
      다음번 들을 땐 봄이겠네요. 히.

      이글이 좋으시다면 아무래도
      오리가 등장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ㅋㅋ
      귀여운 동물들을 사랑하는 흰돌고래님 :)
      총,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게
      왠지 미안해지고 있어요..ㅋ

    • addr | edit/del 흰돌고래 2010.02.20 22:48

      오리때문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ㅎㅎㅎ)

      아니에요 슈풍크님, 저 꽤나 과격(?)해요. 그러니까 그런 단어 아무렇지도 않아요.. ㅎㅎㅎㅎ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0 22:54

      아하하. 빵터졌어요.
      그럼 총 때문에 좋으신 건가요? ㅋㅋㅋㅋ

      흰돌고래님의 과격하신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다니, 흐흐흐.

  2.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2.21 00:21

    http://www.raysoda.com/Com/Photo/View.aspx?u=27634&f=U&pg=1&p=386377
    안 녕 하 고 인 사 를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00:55

      방 과 책 과 컵 과 시 디 와 창 문 과 삼 파 장
      스 탠 드 와 바 닥 에 버 려 진 가 방 과 혼 자
      남 아 있 는 시 간 들 위 로 쌓 이 는 말 없 는
      먼 지 들 과 창 밖 으 로 사 람 들 지 나 가 는
      소 리 와 이 모 두 를 가 능 하 게 해 준 모 든
      것 들 에 대 해 안 녕 하 고 인 사

      했습니다. 이 안녕은 굿바이가 아니라
      헬로우인가요? :)
      스탠드 켜두고 늦도록 글쓰고 싶을 것 같은 방이에요.
      역시 느림보님이시라
      귀퉁이에 밀란쿤데라의 느림이 보이는군요.
      나머진 눈나뻐서 안보이고..
      사진들도 잘 보았습니다. 헤헤.

  3.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2.21 01:26

    아아, 슈풍크님이 보내주신다던 트랙백이 어디있을까 했는데.. ^^*


    So Goodbye, 서정적이면서 우울하죠.. 후렴구를 반복해서 듣습니다.

    So Goodbye, I'm gone..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01:47

      보내는 방법을 아직도 잘 모르겠어서..
      마음으로만 보낸 거였어요 :)
      수동 트랙백? ㅋㅋ

      밝은 노래도 아닌데, 가끔 흥얼거려요.
      신나서 부르는 콧노래처럼요..

  4.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2.21 02:14

    스몰 아카시아 밴드, 저는 제가 모르는 어느 외국 인디밴드인줄 알았네욬ㅋ 하마터면 피치포크에서 스몰 아카시아 밴드를 검색해볼면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꿈을 잘 안꿔요. 제가 잠을 잘자나봅니다. 이래뵈도 불면증이 약간 있는데도 말이죠.
    오~래전부터 자각몽을 꾸는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어요.
    그래서 자각몽을 꾸는 연습을 시도(금방 그만두었지만)하기도 했는데
    애당초 꿈을 안꾸니 연습이고 뭐고 없더군요.
    (저는 그냥 꿈이라도 좀 많이 꾸고 싶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03:34

      피치포크에서 스몰아카시아밴드를 치세요,
      암껏두 안 나와요 ㅋㅋ 꼬뮌님, 노래가사가 영어여서
      그러셨군요. 팀이름과 제목을 테그에만 넣어뒀더니
      이런 혼돈이..ㅋㅋ

      그리고 자각몽을 연습하시다니요. 하하.
      전 자주 꾸는데, 이건 뭐 알려드릴 수도 없고ㅋ
      꿈없는 잠이 최고죠!
      꿈을 대하드라마로 꾸는 저는
      꼬뮌님이 부러운데요.

  5. addr | edit/del | reply 엘군 2010.02.21 04:12

    꿈을 잘 꾸지 않는 저로서는 신기하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22:42

      신기한 일인 줄 몰랐어요.
      원래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니까 확률적으로
      자각하는 경우도 조금 더 많으려니 했는데
      오, 왠지 재밌어요ㅋ

  6.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2.21 20:42

    이 노래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Love is lie는 무척이나 닮아 있더라구요. 한때 이 두곡과 에피톤 프로젝트의 그대는 어디에,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를 같이 무한 반복으로 들었었던 기억이 나네요 ^^

    전 반복되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었는데 요샌 새로운 스토리들이 있더군요. 물론 잘 꾸지는 않지만요 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22:53

      버터플라이랑 랄라라도 그렇구요..
      전체적으로 쓸쓸하고 단조로운 느낌이 가득했는데
      지금도 1집 만한 앨범이 없다고 생각돼요.
      글구 에피톤프로젝트를 좋아하신다니,
      아무래도 즐겨듣는 노래들이 꽤 비슷할 것 같은데요.
      혹시.. 파스텔뮤직 단골 아니신지?ㅋ

      저는 반복되는 꿈은 거의 꾸어본 일이 없어서
      간혹 그럴 때면 굉장히 신경이 쓰이더군요.
      하지만 대부분이 그냥 개꿈ㅋㅋ

  7.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12 18:05

    넌 일생 미움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그것은 사랑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거와 같았어

    이 구절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저는 스몰 아카시아 밴드의 노래보다 비디오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저도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의 한쪽 신발을 들고 냅다 달아나고 싶군요. 저 CD플레이어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까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21:22

      다 안다, 라는 말보다 조금은 이해한다, 라는 말을
      더 믿습니다. 감사해요.

      노래도 좋지만 사실 저 비디오를 무척 좋아합니다.
      남자가 신발을 집어가는 타이밍은 늘 떨려요.
      이어폰에선 몹시 쓸쓸하고도 따스한 목소리,
      이를테면 어떤날의 '초생달'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내릴 쯤엔 그녀가 슬며시..
      웃을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

20050902 날씨맑음

2010. 2. 16. 21:26 from paRamnésie

 

 

 

푸디토리움 - 그저 그렇고 그런 기억

 

 

헤어졌어,

 

간만에 전화를 걸어온 친구 녀석이 아주 아주 드라마틱한 이별 이야기를 들려준다.

목소리가 덤덤하다 못해 명랑하다. 뻥치시네.. 진짜야, 3주 전에..

정말? 아니 왜, 너희 잘 지냈잖아.. 나또한 믿기 힘든 일이었어.


과연 그들의 스토리는 드라마에나 나올법했다.

요는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채로, 여전히 사랑하는 채로

다른 불행이 갑작스레 불어닥쳐, 조각배 같은 사랑을 난파시킨 것이었다.

그들로선 불가항력일 것이었다.


어떡하니.. 받아들이기 힘들었겠다.


하지만 친구야, 정말 미안한데, 그 순간 나는 니가 부러웠어.

마음이 변해서 돌아선 게 아니니까, 싫어져서 손을 놓은 게 아니니까

그리고 말야, 아무 일 없듯 쏟아지는 햇살 아래, 수많은 인파 속에

미처 어찌할 수도 없이, 커단 눈물방울을 뚝뚝 떨굴 만큼

말만한 청년이 그렇게 서러이 울만큼

극적인 슬픔은 흔하지 않아, 아마 네게도 다시는 없는 순간일 거야.

그래서 치명적인 사랑은 멋지고, 이별은 더욱 그래.


내 슬픔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한다구? 그래.. 맞아.

나는 아직도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고, 사랑도 모르고 이별도 모르고..

남들 이야기나 주워들으며 울고 또 웃어, 이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버거워.

그리고 한 가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말야, 어쩌면 그 모든 일이

그녀의 핑계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물론 그녀를 모르고 하는 얘기야..

아무도 그런 나쁜 거짓말로 이별하진 않겠지.


하지만 버젓이 이런 말을 끄적대고 있는 내 자신의 악랄함을, 조금쯤 즐기고 싶다면

너는 나를 이해해줄까?

그리고 너를 위로한답시고 다른 얘기만 엄청스레 떠들었던 그날.

드라마틱하지 못한 내 씁쓸한 스토리는 명함도 못내밀었지만..

그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별것 아닌 기억에 매달렸고, 그 모든 것은 거짓

아니,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고.

 

이 노래의 제목을 보는 순간, 불쑥 생각났었다. 4년전 일기.

울고불고 난리쳤던 이 커플은 그로부터 몇 년 후 결혼했다.

문득 궁금하다, 가사노동과 육아와 숱한 문제들로 맹수처럼 으르렁댈 때

헤어져 죽을 듯이 아파하던 그 날들의 기억은

가슴의 어느 쪽에 보관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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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2.16 23:31

    목소리 좋네요. :) 물론 음악도!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7 18:14

      그렇죠? :)
      이런 목소리, 이런 템포, 이런 사운드
      다다 너무 좋아해요.

  2.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17 00:11

    어느 쪽에 보관돼 있을까요?

    잔잔해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7 18:15

      정말로 묻고 싶어요,
      그마음 어따 뒀니? 라고요. 헤헤.

  3. addr | edit/del | reply 엘군 2010.02.17 04:18

    그 기억이야말로,
    사랑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겠지요..

  4.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2.17 11:36

    아주 가끔식 제 주위 사람들에게도 헤어짐이 있습니다.

    어떻게해서 그걸 알게되면, 저는 그냥 잘됐다는냥
    '잘해어졌어~' 내지는 '바람직해~'를 외칩니다.
    특히, 친한 사람들일수록 더 합니다.

    헤어짐에 슬퍼하거나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이 외적 동조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죠.

    친구의 정서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그 정서를 나눌아는 것이 진짜 위로요, 동조 입니다.

    물론, 슈풍크님은 진작에 그 경지에 도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7 18:20

      사연이 하도 기구하여.. 동조.. 해주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한때 울고불고한
      가벼운 헤프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 경지에 있지 못한 걸요.
      힘들겠다.. 해놓구서,
      사실 니가 부러웠어.. 혼잣말하는
      인간인 걸요.

  5.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2.21 02:21

    이따금 생각하는 것이지만,
    분명히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가상의 공간 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때때로 영혼이나 이성이나 혹은 그밖에 마치 육체와는 무관해보이는 어느 신비스러운 단어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느 가상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지, 그것은 제가 알바가 아니고,
    기억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우리 신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때때로 상처가 남는다면 그 상처에,
    제 생각에는 우리의 기억은 우리의 피부에 골고루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1 03:51

      저는 때로 가슴이 그냥 신체기관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있는 공간 같이 느껴져요.

      정신, 이 아니라 신체에 남는 기억이라..
      궁금하고 흥미로운 이야깁니다.
      꼬뮌님도 그에 관해 독특한 세계관이 있으신 듯해요.
      언제 포스팅 한번.. :)

여행하는 남자

2010. 2. 3. 11:51 from paRamnésie

0

 

 

 

 

  여행하는 남자를 상상한다

 

  강박증처럼 잠시도 가만 멈춰있지 못하는 남자

  자기 생의 과제라도 되는 듯

  가는 곳의 모든 기둥들마다 그 여자의 이름을 새긴다

 

  살아서 다시는 함께 떠날 수 없을 여자의 이름을,

 

  그곳에 가본 적도 없는 그녀가

  영원히 그 낯선 기둥에 묶여있으리란 것은

  그만이 아는 범죄 같은 거였다

 

  이 범죄가 완전하다면 그녀는 때로

  낯선 곳에서 자기와 같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신기한 듯 손뼉이라도 칠지 모른다

  더더욱 완전하다면 그녀는

  그곳에 가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언제까지? 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죠

  어쨌든 그녀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끌고 다닐 작정이에요

  어쩌면, 그녀가 나를 끌고 가는 걸지도

  더 이상은 못가, 내 쪽에서 먼저 주저앉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시겠어요?

  이건 처음부터

  그녀 쪽에선 멈출 수가 없는 여행이에요

  이것은 내 범죄이고, 내 형벌이고

 

  내 기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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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2.03 18:58

    슈풍크님 보면 어쩌면 저랑 좋아하는 색이 비슷한지도 모르겠어요.
    자주색, 보라색 좋아한답니다..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4 13:13

      클리티에님, 빙고! ㅋㅋ
      자주색, 보라색을 제가 좀 남발했죠?
      좀 많이 좋아해서요.

  2.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2.04 09:47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이군요. 내 범죄고 내 형벌이니..

    불을 훔쳤다는걸 기억해주는 이도 자신밖에 없으니.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4 13:17

      아, 그렇네요. 훔친 불덩어리..
      어떤 죄를 가장 뜨겁게 기억하는 건
      그 자신의 가슴이겠습니다.

살겠다,

2010. 1. 20. 16:03 from paRamnésie

0

                       

 

 

 

 

 

 

 

 

 

 

 

 

 

 

 

 

그런 말은 그럴 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널 보니, 살겠다, 라니요

 

 

내게 겪게한 일이 정말로, 죽을 만큼, 당신에게 미안한 일이었나요

 

그 미안함 때문에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만큼?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어른들의 거짓말 베스트3 중 하나입니다

 

내가 동굴 속에서, 오래전 그자리에서 죽어간 뼈들과 인사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패밀리레스토랑에서 귀여운 딸아이 입속에

 

피가 배어나는 미디엄의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넣어주고 있던 걸요

 

만약에 그순간 나를 보았더라면

 

당신은 살겠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이 나를 죽이기로 작정하면 한주먹 꺼리도 아니란 것을, 당신 덕분으로 알게 된 사람한테

 

살겠다, 라니요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당신은 미안하다, 는 말만 앵무새처럼 백 번 하면 되는 것이죠

 

그 백 번을 다 채우면 당신은 대단한 뭔가를 깨달은 듯이, 인생은 자기만의 몫

 

이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죠

 

네네. 인생은 자기만의 몫, 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잠이드니 아침에는 비가 내립니다

 

쪽문 밖으로 팔을 내밀고, 비가 오니 살겠다, 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도

 

비가 들으면, 껄껄, 웃을 일이지요

 

당신은 나 때문에 죽지 않고, 나는 비 때문에 죽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아, 나는 비가 오니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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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첫 순서

2010. 1. 17. 18:45 from paRamnésie

01

 

 

 

 

 

 

 

 

 

 

 

 

 

 

 

 

 

 

 

 

 

 

 

 

 

  그거 알아요?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요

  제일 먼저 고유명사를 잊고, 그 다음에 보통명사를 잊고

  그 다음에 동사를 잊는대요

  일부러 순서를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 상상만해도 멋지지 않아요?

  제일 먼저 당신 이름을 잊고

  그 다음엔 닳고 닳은 사랑이라는 말을 잊고

  그리고는 당신에게 잘 보이려 애썼던

  어쭙잖은 행동들을 다 잊는 거예요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든 뭐든 상관없지 않아요?

  제일 먼저 잊혀질 고유명사 주제에. 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모두, 고작 고유명사일 뿐이다

  그리고 진심으로는 단 한번도

  그런 병에 걸리기를 바란 적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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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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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유령수업 2010.01.18 01:15

    아. 이거 참.
    무언가 이 밤에 읽어선 안 될, 글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인 걸요.

    이 마음으로 어찌 잠들고
    일어나 출근은 어찌 할지 ㅎㅎ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8 10:12

      제 보잘것없는 글이 숙면에 누를 끼치다니요.
      무언가 써선 안 될 글을 쓴 것 같은 기분인 걸요. ㅎㅎ

      무사히 출근하셨기를 :)

  2.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1.18 13:22

    고유명사, 보통명사, 그리고 동사 순인줄은 몰랐어요.

    누군가 불러주기 전까지는 보통명사에 불과해서
    고유명사가 되는게 좋은 건 줄로만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네요.

    보통 구경만하고 슬그머니 도망가는 타입인데,
    한 마디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8 17:29

      기억상실증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정반대의 순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번 기억되면 잘 잊히지 않는 것,
      서정주 시인이 노년에 세계의 어려운 산이름들을
      일삼아 외우셨다는데, 왜 그러셨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슬그머니 도망 가시는 것도 괜찮지만요ㅋ
      흔적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

  3.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1.18 15:10

    아, 사진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8 17:32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서정적자아님 사진이야말로
      마음이 참 훈훈해져요.
      글은 더더욱이요 :)

  4.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18 15:50

    이거... 태국에서 찍은 사진이신가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8 17:35

      네. 태국에 있는 저의 발이군요 :)
      근데 저기가 태국이라는 것이
      도무지 증명되지는 않는 사진이네요
      국경을 넘어가서 발이나 찍고 있다니요ㅋㅋ

  5.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1.19 01:20

    무서웠습니다.
    사진.
    대롱대롱.

    글은. 아프고 아득합니다.
    귀가 먹먹하게.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9 10:59

      대롱대롱, 이란 단어를 이해한 순간..
      아, 무섭습니다, 저도.
      그런 이미지를 보셨다면 도저히
      무섭지 않을 수가 없으셨겠어요.

      그렇지만, 안심하세요.
      저여자의 두발은 땅에 닿아 있어요 :)

    • addr | edit/del 느림보 2010.01.19 11:57

      태국에 발을 두고 오셨군요.
      그렇다면 손과
      눈과 팔과 다리와
      말과 한숨과 웃음들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겠네요.

  6. addr | edit/del | reply 수줍은영혼 2010.01.22 12:20

    제일먼저 잊혀질 고유명사 주제에...... 망치로 맞은듯 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2 22:51

      저한테 해주고 싶은 가장 독한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구, 제가 본의 아니게 망치질을..
      수줍은영혼님. 반가워요 :)

  7.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6.01 15:08 신고

    결국 기억상실증의 끝은 모든 언어의 실종이네요.
    이해가 갑니다. 영화 속의 기억상실증은 고유명사의 상실까지만 이라는 것을...
    그런데 저도 사람의 이름이라든가, 숫자들의 고유한 얽힘 등에 대한 기억상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니 과거의 기억을 상실하는 것보다, 현재를 기억하고 담아두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과 사랑을 잃어가는 것보다, 현재를 느끼지 못하고 둔감해져 가는 것이 더 슬픈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슈풍크님의 발 사진을 보면서 굽이 낮고 편한 신발을 신고 다니며, 그만큼 키가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태국이라는 단어에 기행문이 있을까 했더니 없네요.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