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브레히트를 읽는 여고생의 마음이란 뭐였을까?

 

경비병, 이란 시를 읽는 순간, 불쑥 그애의 노트가 떠올랐다.

첫 페이지에 선명하게 적혀있던, 쿵했던 그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브레히트  ‡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시들 속에선 사랑에의 절박함이, 곧 삶에의 절박함 같다.

삶에의 절박함이, 곧 사랑에의 절박함 같다.

절박하면 사랑 받나, 좀 잘 살아지나?

그거참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사랑도 삶도 절박한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너 절박하지, 절박하잖아? 악착같이 쫓아올 사람만을 인질삼아

온갖 진흙탕으로 끌고다닌다. 가혹한 것은 물론, 비열하기까지 하다.

 

 

02  컬러링이 없어서 잘못 건줄 알았단다.

 

혹독한 여름을 보낸 후, 늘 고르고 골라서 걸어놓던 컬러링을 없앴다.

그런 사소한 일의 이유, 같은 건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내게 사소한 현상이 아니다.

내가 듣지 않을 음악, 타인을 위한 음악, 같은 건 이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라고 결심하자

자연히 상대의 음악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저 빨리 좀 받지, 싶다.

하루아침에 쿨한 인간으로 둔갑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사실은

단 1밀리도 쿨해지지 못한다. 알고 있다.


 

03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황인숙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그래, 죽을 것처럼 피곤할 일도 아니며, 이미 윤기를 잃은 지 오래인 것도 안다.

그런데도 기어이 활자로 박힌, 두렵다, 세 글자를 읽어야만 

生은 나만 두려운 것이 아님을 숙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나, 조금도

숙지하지 못한다. 원고는 안 끝났고, 딴짓하고 있고, 밖에는 비내리고,

비오는 날엔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려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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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01 14:52

    저는 브레이트의 시보다 희곡을 더 좋아해요.
    황인숙의 시는 언제 읽어도 좋네요. 조금쯤은 다정하지만. 조금쯤은 쓸쓸한.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0

      저도 극작가로만 알고 있던 때였는데,
      저 시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도 황인숙 시 좋아해요. 발랄하고 쓸쓸한.
      어찌보면 조울증세 같은 시들요 :)

  2.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3.01 15:03

    나름대로 큰 마음을 먹고 변화를 시도해도 그것을 알아채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 그게 어떤 때는 아쉽기도 하다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못할까봐 전 컬러링 따위는 지정하지 않습니다. 절대 몇백원이 아까워서 그런건 아니구요 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2

      네 어설프게 아는척하며 딴지거는 사람 보다는
      그냥 몰라주는게 좋습니다. 저도 절대
      몇백원이 아까워서 없앤건 아니구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02 09:41

    저는 아직 영시에 익숙하지 않아요.
    브레이트, 이름은 참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최근에 미학에 관련한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건데 말이죠.
    분명히 예술과 예술성이라는 것은 현실의 삶과 괴리를 경험할텐데 말이죠.
    글이 절박하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절박하게 글을 쓰고,
    혹은 절박하게 글을 읽는 다는 것. @(*#@&#
    아. 바빠서.. 다음에 글은 이어 쓸래요...-_-;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3:49

      독일 사람이니.. 영시는 아니지만요, 헤헤.
      마르크스를 좋아하시니까
      브레히트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편견이 좀
      생기는데요 :)

      절박한 걸 쓰고 읽는 걸 좋아합니다만
      현실의 절박함과는 분명 괴리된 것이겠지요
      그 거리가 얼만큼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기까지만.. :)

  4.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02 14:03

    영시는 외국시라는 의미었다고 억지부려봅니다..
    외국시는 어떤 경로로 읽어야 하나요?
    시중에 나온 번역책을 읽는 것인가요?
    번역책이 구하기 쉽나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2 14:52

      그런 의미로 사용하셨을 거라 생각했어요ㅋ

      요즘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를
      열심히 검색해보면서 저도 했던 생각입니다.
      아, 외국시는 도대체 어떻게 읽으란 말인가,
      하는 좌절의 외침. 소설보다 시는 완전 절벽입니다.
      딱 한권 출판된 번역 시선집은 절판이고
      그나마 인터넷에 몇편 올라와있는 시들은
      오자 투성이고.
      번역서가 잘 나와있는 유명 시인만 골라서
      좋아해야하는 건가, 싶습니다.
      외국어를 공부해서 그 언어로 읽는다는 것은
      평생이 걸릴 것 같고.

      저의 결론은 구하기 쉽지 않다, 입니다.
      그나마 외국 시들을 컴필레이션으로 소개해 놓은
      책들은 간간히 있어서 그거에 의존해 봅니다.
      외국문학 전공하시는 분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푸념만 길었습니다. 어흙.

  5.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05 13:10

    브레히트의 시는 그것이 과연 시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한 사람이 침묵보다 더 깊은 독백이었다고 생각하면 시가 아닐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05 17:12

      짧은 가운데 비유가 있고, 내용적으로
      더이상 부연할 것이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시의 형식을 띄지 않아도,
      충분히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