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예담,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27p.

귀를 자른 일로 고갱이 동생 테오에게 연락했다는 걸 알고서

고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리고 퇴원 후 고갱에게 편지를 썼다.

모든 일이 늘 좋아지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 악의는 없었다는 걸 알아 달라고,

고흐의 유언처럼 생각되는 말. 그때 그의 세상에선 모든 일이 얼마나 좋아지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조롱한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의 세상은 멋진 세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이 가벼워지질 않는다.

 

   

02 내 집 낡은 뻐꾸기시계는 제 울음의 횟수가 따로 있다

 

밤 한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스무 번 깨어 울거나

아홉시에 달랑 한번만 탁, 침 뱉고 들어가거나

다음날 정오엔 절마다 동백꽃 속에 빠진 채 아예 잠잠하거나


나 또한 나만의 눈물의 횟수가 따로 있으니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

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

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


스무살에는 서른을 대고

서른엔 스무살인 척했거니

첫눈에 눈물의 횟수를 알아맞힌 그 새와 나,


번번이 땅에 떨어지는 얼굴이며, 다음날 약속을

전날에 나가 자처하는 이별 통첩이며, 내일의 줄거리를

다 발설하고 마는 어제 따위까지


다른 시간들은 다 아무래도 좋았다


김경미  ‡  눈물의 횟수


 

03 이석원의 산문집에 인명색인이 있어 놀랐다.

 

거기에 황경신이 있어서 좋고, 고흐가 있어서 좋고, 전경린이 있어서 좋고,

왕가위와 이소라가 있어서 좋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어서 좋았다.

 

 

04 왜 자꾸 한숨 쉬는지, 궁금해?

 

이건 꽤 오래된 습관인데 말이야

있지 나는, 설레기 전에 아픔을 연습해,

그러고 나면 절대로, 아픈 일이란 일어나지 않아

내가 가진 유일하게 좋은 습관일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그걸 빼먹는 순간, 끝장인 거야.

 

 

05 잠깐만 한 눈 팔면 사라져버리는 물건;

 

똑딱 볼펜, 딱풀, 포스트잇, 손톱깎이, 귀이개, 안경닦이, 젤 좋아하는 양말, 모든 무료 쿠폰,

USB 뚜껑, 귀걸이 한쪽, 머리 묶는 고무줄, 충전용 건전지, 식염수 병, 오래전의 편지, 지하철 노선도,

도장, 몇 개 남았을 두통약,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A4용지, 통화중에 휘갈겨 쓴 전화번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여배우의 얼굴, 짝사랑의 상대, 별똥별, 집중력,


그리고 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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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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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12 00:16

    보라색 글씨도 참 좋아요 님 ! 꺄웅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2 00:58

      이 세상에 좋아하는 게
      느무느무~ 많을 것 같은, 흰돌고래님!
      초면에 귀여우시다고 써도 되나요? >_<
      흰돌고래님 댓글 덕분에
      사라져버린 명랑을 단숨에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고맙습니다. 히히.

  2.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2.12 00:19

    여기 색이 참 좋아요. 자주빛, 초록빛 . . 옆에 꽃을 든 사진이랑 아래에 빨간 물고기들도요. 저는 노란 물고기인데^^

    '멋진 세상, 악의는 없었소'
    고흐, 고흐, 고흐 T*T
    아무래도 오늘밤 고흐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
    (저도 반고흐, 영혼의 편지가 있어요. 그림책이랑요. 헤헤)

  3. addr | edit/del | reply 엘군 2010.02.12 00:20

    잠깐만 한눈 팔면 사라지는 것에는,

    정신,

    이 있지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2 00:59

      아, 그것이 있었군요.

      그걸 빼먹다니
      제가 또 한눈 팔았나봅니다ㅎ

  4.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2.13 16:45

    황경신, 고흐, 전경린, 왕가위, 이소라...
    어쩜 슈풍크님과 저랑 취향이 같을까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슈풍크님에게 끌렸었나봐요.
    아, 표현이 조금 느끼한가요..

    슈풍크님, 설 명절 잘 보내셔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3 21:44

      클리티에님, 뭐 그정도의 느끼함이라면
      기꺼이 즐긴답니다. 푸하하.
      저의 문화적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사실 오프라인에선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그다지 많은 편도 아니어서
      더 반가운 맘이에요.

      클리티에님도 즐거운 설 보내세요 :)

  5.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2.14 01:53

    1. 고흐, 영혼의 편지.. 그 책 저도 졸라 좋아해요ㅠㅠ 도서관에서 빌려읽고서, 다 읽은 책을 서점에 보이기만 하면 소장용으로 살까 늘 망설입니다.ㅜㅜ/으아유 ㅠㅠㅠ
    4. 전.. 그냥.. 평소에..보통...졸라졸라 잘 설레는 타입이랄까... 연습은? 그런건 없는듯..요.
    5. 딴건 몰라도, USB뚜껑만큼은 강력히 공감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14 21:39

      1. 저는 여러 번 읽은 책을 누구 줘버려서,
      개정판으로 또샀어요. 왠지 옛날 것이 더 좋아요.
      4. 실전에 자신없기 때매 연습은 열심히 합니다ㅋ
      5. 심지어 유에스비 잃어버리고 뚜껑만 남은
      뷁스러운 경우도.. 하여 최근에
      뚜껑이 따로 없는 디자인으로 구입했습니다.
      꼬뮌님께도 강추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