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지라니, 당치도 않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원고를 써대고 출력하고 폐기해왔다.

사실 소모적인 작업이며, 일이 끝나면 원고는 버리는 게 상책이건만

바로바로 버리질 못하고 꼭 엄청나게 퇴적된 후에야

어쩔 수 없이 내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거사를 감행한다.

그러니 늘 엄청난 양이다. 세상에나, 종이가 아깝다.

이 시답잖은 토너 자국을 위해 늘 소모해온 삶이기에

종이 아까운 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내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원고에 사용한 종이에 있어서, 이면지란 없다.


뒷면은 깨끗했다. 분명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찢는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세로로 찢은 후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서 깍두기 썰듯이 조각조각 찢는다.

양이 양이니만큼 찢는 손도 아프다. 가장자리에 손을 베는 일도 생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상상한다.

누군가 출력한 서류를 읽다가 우연히 그 뒷면의 글자들을 발견한 후,

뭐에 홀린 듯 이면지 상자를 뒤져가며 그것을 구독하고 있는 상황을.

끔찍하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개인적인 소설을 훔쳐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이면지를 읽고 있던 내 자신을 생각하니

그 친구와 절대로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니 이면지를 읽었어, 그 이면의 이야기가 좋았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면지에서 본 이야기, 이면지에서 본 누군가의 마음,

이라니 말이다.

이것이 어떠한 상황인지, 나는 피부로 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나라는 사람이 그의 노트 한가운데 씌어져 있기를 바란 적은 없다.

행여 그럴 리도 없겠고.

하지만 그에게 소중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그 이면에 말이다.

무심코 한번 뒤집어 보았더니, 거기에 내가 있다고 말이다.

그 이면지의 여자를 말이다.


차라리 찢어라, 쭉쭉 찢어버리고

거기에 다른 무엇도 다시 출력하지 말아라. 라고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면지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것을 찢어버리지 못한 것은 나였다.

그는 나를 찢었을까. 아니면 아주 그럴듯한 문서의 뒷면으로 재활용해 주었을까.

지금도 이면지 상자 속에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이글을 쓰고 출력한 뒤에 한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이면지 통 앞에 서서 보란 듯이

뒷면이 아직 깨끗한 이 종이를 쭉쭉 찢을 것이다.

완전한 소멸을 집행하는 손동작에는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다.

그것은 심지어, 경쾌하다.


이면지라니, 당치도 않다.

 

 

 

 

 

 

 

조원선 - 아무도,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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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3.16 13:28

    이면지를 찢는 슈풍크님의 손은 길고 차가운 흰빛일듯...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17

      찢는다는 행동은, 그런 손에게 참 잘어울리네요.
      그런데 참 어울리지 않게 제손은 늘 뜨겁고
      길다란 손가락은 이상해보일 지경이고요..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7 21:34

    이면지의 여자. 시로 한번 써보세요. 읽고싶네요.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20

      비슷한 제목의 것을 쓴적이 있어요.
      아주 짧고 조악한 것이었어요.
      자아님께는 정말 멋지게 써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꼭 그러고 싶어요 :)

  3.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3.18 09:37

    좋아하는 시를 인쇄하고,
    그리고 버린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시를 왜 버리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저는 그것들을 버리면서,
    누군가가 시를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가 단지 좋아하는 시가 아니라,
    제가 쓴 시라면, 그리 하지 못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9 12:27

      '누군가가 쓴 것'과 '내가 쓴 것'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겠지요.
      완벽히 같은 단어나 문장을 쓴다고 해도요.
      두개는 완벽히 같아질 수가 없어요.
      남의 것은 함부로 찢을 수 없겠지만
      제것이니 찢을 수도 있고요.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게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러나 자기 마음에선 없어지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