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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2010.01.24 20:20 from morceAu
 

01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까요, 공효진이 푸념을 했다.

 

그러자 마주 앉은 여자가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거, 물 맞거등.

그 순간 <파스타>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결심하였다. 간만에 보는 명랑한 드라마.

미실을 떠나보낸 이후로, 기나긴 사극을 볼 지구력을 상실했다.


 

 

02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진은영  ‡  긴 손가락의 詩

 

근래에 알게 된 시인 중에서 무척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각별한 애착을 두지 않았던

진은영의 시들이, 부쩍 좋아진다.

 


 

03   오, 라는 외마디는 어쩜 이리 씨니컬하고도 호들갑스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폴의 노래 가사를 놓고, 네가 망친 폐허를 보렴, 오, 사랑, 이라고 장난쳤던 날이 생각나 마음깊이

반성했다. 그나저나 <여배우들>에서 오, 사랑이 흘러나왔던 그 타이밍은 참으로 뭉클하였다.

근데 분위기 깨서 정말 미안하지만, 중간에 가사 틀렸다, 가사 틀렸다,, 혼자서 막 이러고.


 

 

04   지난달 상선생님께서 음주 중에 그려주신 초상화는

 

배낭에 넣어둔 그대로 손바닥 만한 크기로 여러 번 접혀있다. 표구를 하려고 매번 마음먹지만

매번 그대로 접어둔다. 선생님, 이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표지로 써도 좋을법한 초상화예요,

라고 말한 것이 무척이나 민망하게 생각되어서. 낙관까지 찍어주신 그 그림을 쓰게 될 날이

오기는 올까. 추천하신『헤겔 미학』부터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05   왜 하필? 이라고 물은 사람, 현재까지 무려 3人.

 

듬직한 아이돌 다놔두고 왜 하필? 이라니! 오기가 발동한다.

그렇다면 더욱더 열렬히 사랑해주지.

나는 깝권이 좋다아~

 

 

 

06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궁극적으로 먹고 싶은 게 뭔데? 우습지 않은가, 돼지껍데기라니.

내 블로그의 이름은 궁극의 돼지껍데기야.

 

참 여지도 없으시지. 나는 지지않고 대들었다.

지금까지 선배 패러디 중에 최고로 모욕적이예요! 그러자 답이 왔다.

그게 바로, 기획의도야. 껄껄.

흥. 정말로 그런 블로그를 만들까봐 나 사실 살짝 쫄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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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01:55

    글쟁이들은 언제나 부러워요.
    왜냐하면, 글을 잘쓰니까요.
    또 왜냐하면, 흠.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6:26

      생략하신 두 번째 이유가
      몹시 궁금합니다.
      뭔가 반전이 있을 것 같은..

  2.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16:55

    두번째 이유는..(만족스러운 반전이 못될 것 같아 안타깝지만,)
    바로, ‘글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7:34

      아, 밥이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로 생활을 유지해나간다는 것..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1.27 17:00

    진은영 님의 시. 가슴 한 구석이 '덜컹!'하네요.
    나도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1

      다른 시들도 다 좋지만,
      그녀의 시론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내게서 가장 멀리 자라나있는 손가락의 끝으로
      아, 멋진 걸 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4.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1.27 17:24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 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 까요'
    그거 물이 맞거든 했지만,

    술일 때도 물처럼 싱거운 순간도 있잖아요.

    감정의 동요를 불러 일으키게 글 잘 쓰시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7

      에구, 과찬이세요.
      감정의 동요! 그런거 제가좀 좋아합니다 :)

      근데 정말로 술이 물처럼 싱거울 수가 있나요?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는ㅋ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9 03:27

      아, 칭찬 감사합니다 :)
      한때는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을 때
      저말이 무슨 말일까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도둑이 제발 저리듯..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거나
      허황되게 꾸며댄다거나,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거나
      그런 의미로 들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에 와선
      진.심.으.로. 감사해요.
      저란사람이 뭔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은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술이 싱겁게 느껴질 만큼
      쓰디쓴 인생의 맛을 알게 되더라도,
      감수성 있는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ㅎㅎ

    • addr | edit/del 고무풍선기린 2010.01.29 13:19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신 것 같고,
      그 감수성이 글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래도 술의 쓴 맛을 느끼지 못할 떄가
      있었던 걸 보면,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싱겁다는 말은 과장일 테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