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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4 사진이 좋군요 (10)

사진이 좋군요

2010.04.14 14:56 from morceAu
 

01 사진이 좋군요,


그러자 그가 짧게 답했다.

후보정일 뿐입니다.


아, 하고 나는 다른 무엇을 떠올렸는데

그건 누군가를 찍은 몇 장의 사진이었고

아주 그럴 듯한 후보정을 거쳐

내 생애 최고의 풍경으로 남아버린 어떤 장면에 관한

인공적인 모놀로그였다.


이것이 당신의 사랑이군요,

그러자 내가 짧게 답했다.

후보정일 뿐입니다.



02 나는 낯선 이들을 웃기고 난 뒤 안도하는 사람.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은 수난자들의 질문입니다'라는 알료사의 말에

밑줄 긋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나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봐 무릎이 떨리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 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김애란  ‡  영원한 화자 中


 

03 죽는 순간 아주 살짝,

 


키가 준다고 생각하는 부족이 있다

안녕히! 나는 찢어진 당신 그림자에 인사한다

심장에 흰 제비꽃 무덤이 돋은 나를

내 그림자는 알고 있고

풀 무덤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안녕히! 당신 그림자의 키를 잰 최초의 여름이

풀꽃처럼 웃으며 지나가는 저녁이다

찢어진 그림자가 사뿐히 공중에 떠오른다

가벼워진 당신 그림자에 드리는 첫 입맞춤,

걱정 말아요 아주 살짝, 키가 주는 것일 뿐

당신은 잘 싸웠어요

잘 사랑했어요

쉼표처럼.

살짝 키가 주는 것

쉼표처럼.

살짝 쉬는 것

 

김선우  ‡  그림자의 키를 재다 中

 

 

04 당신이 내 영혼을 빨대로 빨고 있어요.


안나 아흐마토바  ‡  당신이 내 영혼을 中

Anna Andreyevna Akhmatova. 1889-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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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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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旅인 2010.04.14 15:41

    01번 후보정이 필요없는 사진과 사랑을 위하여...
    02, 03번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한표
    04번! 나의 영혼을 빨대로 빨아준 당신이 있었거나, 있거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이 비극에 저주를...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4.14 21:36

      여인님의 답글에 나는 한표.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19:58

      여인님의 답글에 저도 한표 추가요~ ㅋㅋ
      네네. 후보정이 필요없는, 소용없는, 그런 사진이요.
      그래서 필름이 좋아요!
      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두 분의 댓글이
      얼마나 기다려지고 반가운지 모르실 거예요. 헤헤.
      감사해요 :)

  2. addr | edit/del | reply 봄눈별 2010.04.15 02:01

    글을 세 번,
    다시 읽어내려간
    지금 저의 기분은
    미로에 갇힌 구름이 된 것 같아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19:59

      여러 번 읽어주셔서 영광이에요 :)
      떠다니는 구름이
      미로속에 갇히다니요.. 아, 뭔가 멋진데요?!

  3. addr | edit/del | reply 흰돌고래 2010.04.15 18:48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 뒷걸음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20:15

      앗, 돌고래님! 저도 그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때로는 뒷걸음치더라도
      마지막까지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저는 좋아요 :)

  4. addr | edit/del | reply 위소보루 2010.04.18 19:15

    영혼을 빨대로 빨다라는 문장에서 왠지 젤리포 같은 것을 빨대로 빨았을 때 뭉텅뭉텅 기분 좋게 들어오는 입의 감각을 떠올렸습니다. ㅋ

    후보정일 뿐이라는 진심과 거짓말의 사이.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4.20 20:14

      아, 말캉말캉 젤리포! +_+
      어렸을 때 엄청 좋아했었는데
      그 감각이 떠오르네요. 히히.

      아마도 진심이었으면 하는 거짓말, 이었을 거예요.

  5. addr | edit/del | reply 2010.04.19 21:03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