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잎'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1.16 유과와 마카로니에 관한, 꽤나 장황한 메시지 (10)

 

 

 

 

 

무려 1년여 만에, S언니를 만나게 된 동기는

새벽에 받은 한 줄의 메시지였다

 

나 유과가 먹고 싶어, 집에서 손수 만든 유과.

 

 

이냥반이 늙나보다, 요즘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요? 제조법을 배운다면 모를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물론, 씹어드렸다. 우리 관계의 이력이라는 것이 그렇다

뭘 하는지도 모르게 각자 잘 지내다가 이따금씩 서로 문자를 보낸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매번 상대의 답장을 간절히 요구하는 것이지만, 쿨하게 씹어준다, 그것은 쌍방의 약속 같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우리는 그 무언의 약속을 꽤나 잘 지키는데, 그러다 어느 한쪽이

더이상 문자씹기에 항복을 외치면, 전화벨이 울리고, 우리는 득달같이 만나야한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랜 문자씹기의 공백을 뛰어넘어 미친듯이 그간의 못한 말을

뱉어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거의 구토의 형상과 같다고 상상하면 된다

우물이 마르듯이 저장된 말들이 바닥나면 우리는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쿨한 침묵의 시대이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참 두서도 없지, 새벽에 손수 만든 유과, 따위를 먹고싶어하는 여자가

진심으로 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소 접선 예상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더 오버하여

나를 이리저리 끌고다닌 걸 보면, 분명 몸살이 나도 단단히 날 텐데

그녀는 오늘 단단히,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물론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부터라도 문자를 씹지 않기로 반성도 하고 결심도 한다

그리고 언니에게 영화본 얘기를 주구장창 떠들어댔는데

정작 가장 슬펐던 장면에 대해서는 어쩐지 말하지를 못했다. 이런걸 장문의 메시지로 보내면

언니는 씹을 것이 불보듯 뻔하므로, 나는 여기에 쓰는 쪽을 택한다

 

영화에서; 그 여자는 비디오에 자기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어느 갤러리 담당자에게 그것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규정은 우편 송부였지만, 그녀는 거리도 멀지 않고 직접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테잎을 들고 찾아간다, 담당자를 만난다, 하지만 담당자는 왜 우편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가져왔느냐고 반문한다, 가져온 테잎에 손도 대지 않는다

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는 수 없이 테잎을 들고나와 담당자들과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탄다, 휘청, 하는 순간 여자는 사뭇 작위적인 동작으로 테잎을 떨어뜨리고

담당자가 그것을 줍는다, 우편으로 송부되어야할 테잎이 단숨에

가야할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말이다,

그걸 주운 담당자는 왜 자기 물건을 칠칠치 못하게 떨어뜨리냐는 듯이 심상한 표정으로

테잎을 그녀 손에 돌려준다, 겨우겨우 이손에서 저손으로 옮겨간, 그것을 말이다

나는 정말로 그때 울고 싶었다, 집에는 달래줄 사람도 없는데

정말로 소리내어 울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당자는 결국 그 테잎을 보았느냐고?

화면 속의 그녀가 말한다, 당신은 분명 이것을 보고 있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나는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당신이 아직 스탑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아직 이것을 보고 있다면

제발 내게 전화해 달라고,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 마디만 하라고, 마.카.로.니.

그러면 나는 당신이 지금 나를 보고 있음을, 내말을 듣고 있음을 알아차릴 거라고

그거면 된다고, 전화는 끊어도 좋다고, 그리고 기적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하니 언니의 유과는, 내게 영화 속의 마카로니, 였다

손수만든 유과라니... 그것은 세상의 까만 점 하나가, 다른 까만 점 하나에게 보내는

무언의 통신 같은 거였다. 전화기 바깥에서 그녀가 나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같이 추운 어느 날 밤

어느새 호호 할머니가 되신 시골 큰고모집에 전화를 걸어

고모고모, 유과 만들려면 어뜩해요? 라고 이것저것 두서없이 물어댈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떤 밤에는, 유과도 아니고 마카로니도 아닌

이상한 암호를 당신에게 말해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은 알아챌지 모른다, 그러면 전화는 끊어도 괜찮다

그러면 이 침묵의 시대도 조금 견딜만하다

'songEr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덕위의 수영장  (7) 2010.01.30
절반의 얼굴  (4) 2010.01.20
유과와 마카로니에 관한, 꽤나 장황한 메시지  (10) 2010.01.16
내겐 너무 곤욕스러운 그녀  (0) 2010.01.14
휘파람, 이라는 메타포  (2) 2010.01.14
신경숙 냄새  (4) 2010.01.13
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1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17 15:43

    잊고 있었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장난삼아,
    전화를 걸어, ‘마카로니!’라고 말하고 끊는 장난을 한적이 있었죠.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17 18:52

      저는 미수에 그친 그것을,
      실행에 옮기시다니, 진정한 용자, 이십니다 ㅋㅋ
      그사람이 그걸 알아들었을지 궁금하군요.

    • addr | edit/del 엘군 2010.02.06 02:33

      알아들었답니다.


      (응?)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6 02:38

      알아들으셨다니 다행,, 응?

      저 순간 오해했어요.
      꼬뮌님이 엘군님한테 전화하셨나?
      ㅋㅋㅋㅋ

    • addr | edit/del 꼬뮌 2010.02.07 00:51

      저도 잠깐 오해했습니닼ㅋㅋㅋㅋㅋ

  2.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2.05 22:17

    '그녀는 오늘 단단히,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 '손수 만든 유과'
    이 둘이 침전해 있는 무뎌빠진 감수성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이 둘에서 제 모습을 봤기 때문이겠지요.


    덧말. 쭉 다 읽고 보니까, 지난 달에 작성하신 포스트였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6 02:36

      뒤흔드는 거 나쁘지만
      감수성 정도라면.. 괜찮은 거겠지요? :)

      쓴지 조금 된 글인데, 폴더를 옮겼더니
      업데이트된 글 목록에 뜨는 모양이에요.
      쓰고나서 괜히 한군데씩 고치고 그러는데,
      매번 새글로 뜬다는 건, 좀 이상한데요.
      원래 여기 시스템이 그런가요?

    • addr | edit/del 고무풍선기린 2010.02.06 11:11

      저는 관심블로그 알리미를 통해서 들어오는데,
      관불알리미는 업데이트하면 그것을 알려줍니다.

      저도 S언니첢 '유과'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럽습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2.06 01:04

    미란다 쥴라이 영화죠. 전 이 영화의 초반에 남자가 자신의 손에 불을 붙이는 장면만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아니 아주 많이 울게 됩니다.

    말로도 담을 수 없는 것. 그것을 몸에 담았지만, 전해지지 않아요. 뜨겁습니다. 뜨거워요. 아프고 뜨겁고 바보같고 후회 스럽고

    그렇지만

    되돌릴 수 없어요.

    그래요. 조난 신호를 보내듯이 하나의 까만 점이 또 다른 까만 점에게.
    거기 있는가 오우버
    잘 지내고 있는가 오우버


    ..
    .
    ...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06 02:28

      몇개의 점들이 마치, 모스부호 같네요.

      기억할 만한 장면들,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크래쉬나 나인라이브즈 같은
      옴니버스를 본 느낌이었어요.
      불타는 손, 분홍신발, 금붕어 봉지도 생각나고,
      일생이라고 상상하며 둘이 걷던 길,
      내차에서 내려달라던 남자의 차가운 말,
      채팅의 달인 변태 꼬마도 생각나고,
      보물 콜렉션을 가진 여자아이도 생각나고,
      두 사람의 겹쳐지던 손도 생각나구요.

      뭉클했던 포인트를 보니
      저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슬프고
      느림보님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모양이에요.
      사람으로 사는 일과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이런 영화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어쨌든 그러므로 굿나잇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