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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지만 마라

2010.03.11 19:04 from morceAu
 

01 놓지만 마라, 잡고만 있어,

 

라고 꼭 작년 이때쯤 선배가 해준 말, 잊지 않고 있어요. 우리 학부 때도 친하질 않았는데

사실은 얼굴도 표정도 말투도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인 선배였었는데, 그런 말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네, 놓지는 않고 있어요. 대체 언제 공부할래, 당장 복학 안해? 버럭하실 것 같아서,

전화는 도저히 못 받겠습니다. 그 책 잠깐 봤어요. 정확히는 선배가 쓴 부분만.

그리고 솔직히, 그 책에서 좋은 건 이 부분 뿐이었어요.

 

"모든 사물은 '외로움'을 수식할 수 있다.

개 같은 외로움, 궁서체 같은 외로움,

대통령 같은 외로움, 예수, 석가, 공자, 칸트 같은 외로움,

한반도 같은, 지구 같은, 명왕성 같은 외로움

 

내가 명왕성을 인식할 때 명왕성은 넓고 포근한 우주에서 홀로 뜯어져 나와야 한다.

외로움은 사물의 운명이기보다는, 사물을 홀로 서게 하는 인식의 운명이다.

낚시바늘에 어떤 물고기가 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낚시바늘 자체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고는 어떤 사물도 구별할 수 없기에, 외로움의 반대말은 없다.

그래서 나는 외로울 때마다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안 외롭다."

 

이강하  ‡  <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 바람의 속도로 길을 걷다 中

 


02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철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이영광  ‡  사랑의 미안

 

 

03 풀밭 위의 식사를 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샀다. 이 두권때문에 잔뜩 들떴었는데 집에 와서 한 짓이란,

5회나 못봤던 파스타를 가슴 졸이며 보는 거였다. 그가 묻는다. 그렇게 재밌어? 이선균이 글케 좋아?

응 재밌어! 좋아! 소리만 벅벅 질르는데, 그래도 너무 좋아. 뱉어놓고 아차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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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1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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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0

    어머나. 이영광. 이영광. 이영광.
    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합니다.
    그 덥수룩한 얼굴이라니요. 그 사투리.. 다시 듣고 싶고요..
    그 음성.. 아, 정다운 음성과 수줍은 듯한 미소.

    아, 사랑의 미안은 처음 읽습니다. 최근 시인가요. 시가 좀 달라졌네요.
    참 반갑습니다. 좋은 시 올려줘서 고맙습니다. :)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3.12 16:45

      그의 시는 좀.. 뜨겁다기 보다는..
      상처받은 곰이 쓴 것 같이..
      좀 처연하고.. 수더분하고 그랬는데..
      시가 좀 달라졌네요..
      근데. 참 좋네요. 그가 달라진 것이.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20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시를 보았습니다. 본래 어디에
      발표된 작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구요..
      저는 이 시를 보고서 이영광 이라는 시인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전작들을 찾아서 보게 된 케이스죠.

      아, 상처받은 곰이라니요..
      그의 전작들을 보며 떠올린 게
      덥수룩하고 수더분한.. 그런 이미지였는데
      아주 적합한 표현인듯 해요. 하하.
      이 시가 자아님께 기쁨이 된 것 같아서
      저두 흐뭇해요 :)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1

    박민규는... 늘 중반 이후에 흐지부지 되는 경향이 있어서 장편은 별로 안 좋아라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2

      박민규는 단편이 너무 좋아요.
      이 책은 발췌된 문구를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좋아서
      충동 구매했어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6

    이영광에 흥분에 쭈르르 답글을 네개나 달다니. 흑.. 죄송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0

      아하하.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반가운 걸요 :)

  4. addr | edit/del | reply ronyc 2010.03.15 13:03

    제게도 이선균은 '그 정도로 너무 좋다'고 외쳐도 당당히 좋은 이. ㅋㅋㅋㅋㅋ
    제 친구는 자꾸 이선균은 웃을 때 드러나는 선홍빛 잇몸이 지나치다며 제 사랑을 잡치네요. 뭘 모르는 것. 쳇.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5 20:46

      그렇잖아도 올리신 사진 보고 반가웠습니다. 히히.

      친구분께 제가 감히 이런 말씀 드리면 안되지만
      뭘 모르시는 군요. ㅋㅋㅋ
      그가 간간히 잇몸이 드러나게 웃는 날이면
      아, 온세상이 다 웃는 것 같아효 ㅋㅋㅋ

  5. addr | edit/del | reply 수은 2010.03.16 00:36

    언제 저도 모르게 텍큐의 블로그를 다시 여셨네요. :)
    하긴, 제가 텍큐에 근 한달 넘게 좀 소홀하긴 했져.
    전 완전, 박민규빠여요. 민규님은 모르시겠지만. 개인적으로 파반느는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하하하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6 13:07

      수은님의 포스팅을 무척 고대하는데
      목이 좀 늘어난 것 같긴 합니다. 히히.
      박민규빠가 제 주변에 은근 많군요!
      근데 저는 복면쓴 사진 보고 좀 식겁하였습니다.
      저는 좀 심약한 빠입니다 ㅋㅋㅋ
      파반느의 반응이 대체로 약하군요.
      어쩐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