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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6 천박해질 권리 (5)

천박해질 권리

2010.02.26 03:42 from paRamnésie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수잔 손탁  ‡  타인의 고통 中

 

 

 



 

 

 

 

 

 

 

 

 

 

 

 

 

 

 

 

 

라디오는 어때? 라고 당신이 물었을 때

그 화창한 봄의 수목원에서요,

매일매일 빨고 또 빤 빨래를 색이 다 빠질 때까지

유한락스에 손이 삭아서 없어질 때까지 문대고 있는 기분이에요, 라고 내가 말할 때

당신 손엔 수잔 손탁의 책이 들려 있었지요. 재밌어요, 그책?

고통인데, 재밌을리가. 그래봐야 타인의 것이잖아요.

그리고는 꽤나 짜증스런 선문답이 이어졌는데, 내가 했던 말도 당신이 했던 말도

기억에 없어요. 당신은 꽃들 속에 지친 듯 앉아있었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도 사진을 안 찍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봄이 너무 휘황하여 그랬나요?

그 봄이 또 오려는지 오늘은 날이 따스했지요, 이제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이것은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 일 뿐이라고요.

미안하단 말 듣기 싫고, 무력하단 말은 더 듣기 싫고

그냥 읽지 않을 책의 목록이 좀 더 생겼습니다, 라고요.

말하건대 수잔 손탁은 읽지 않겠어요, 아무와도 수잔 손탁에 대해선 이야기 않겠어요.

이것이 당신에 대한 내 애정과 환멸과 고통에 대한 맹세라면 코웃음 칠 건가요?

그래도 다행인 건, 다시는 수목원에 안 가겠어요,

라는 말은 죽어도 못 하겠네요.

무엇을 잃어도 아 수목원에는 가고 싶어요, 어서 장미가 피어서,

그 화려한 것들을 차마 찍지는 못하고 보고만 싶어요,

느리게 지나는 오후 내내, 넋을 놓고. 천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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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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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2.26 10:21

    지금의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환멸과 분노를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저는 ㅠ.ㅠ
    까짓거. 그냥 미성숙한거 인정 ! 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6 20:28

      지금의 여기에서는, 성숙이 성숙하지 못하고
      미성숙이 미성숙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박함이나 탐하고 있는 것이 참 부끄럽네요..

    • addr | edit/del 느림보 2010.02.27 09:39

      사실은 수전 손탁을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고 하는게 맞겠죠. 이사람 책을 사게 된것도 얼굴에 반해서 샀으니까요.

      간혹 글이 안풀릴때 읽는 책들이 있는데, 손탁의 책이 그렇습니다. 명문이라기엔 좀 뭤하지만, 기능적이고 명료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글을 쓰고 싶은데 말이죠. 생각이 너무 많아요. 오대수씨랑 비슷하게. 그럼 나도 5 년간 군만두 철창에 가야할까요. 흙.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2.27 11:22

      제가 르 클레지오 책을 산 이유와 비슷하군요. 하하하.

      저는 뭐랄까, 엄격함이 느껴지는 작가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의미나 다른 이미지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압도적인 느낌을요.
      맹세는 맹세이고, 두려움은 두려움이고,
      좋은 글에 대해선 앞뒤 안가리고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상상을 하지 말아봐, 라는 오달수씨 대사가
      음성서비스로 ㅋㅋㅋ
      군만두 말고 산낙지를 드셔보심이..
      그리구 오대수씨정도 명료해지시려면,
      똑같이 15년 정도는.. ㅋㅋㅋ 죄송해요.

    • addr | edit/del 느림보 2010.02.28 09:45

      앗. 손탁은 엄격하지 않은데. 저에겐 거의 여자 아이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