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3.11 놓지만 마라 (11)
  2. 2010.01.24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10)

놓지만 마라

2010.03.11 19:04 from morceAu
 

01 놓지만 마라, 잡고만 있어,

 

라고 꼭 작년 이때쯤 선배가 해준 말, 잊지 않고 있어요. 우리 학부 때도 친하질 않았는데

사실은 얼굴도 표정도 말투도 너무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인 선배였었는데, 그런 말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네, 놓지는 않고 있어요. 대체 언제 공부할래, 당장 복학 안해? 버럭하실 것 같아서,

전화는 도저히 못 받겠습니다. 그 책 잠깐 봤어요. 정확히는 선배가 쓴 부분만.

그리고 솔직히, 그 책에서 좋은 건 이 부분 뿐이었어요.

 

"모든 사물은 '외로움'을 수식할 수 있다.

개 같은 외로움, 궁서체 같은 외로움,

대통령 같은 외로움, 예수, 석가, 공자, 칸트 같은 외로움,

한반도 같은, 지구 같은, 명왕성 같은 외로움

 

내가 명왕성을 인식할 때 명왕성은 넓고 포근한 우주에서 홀로 뜯어져 나와야 한다.

외로움은 사물의 운명이기보다는, 사물을 홀로 서게 하는 인식의 운명이다.

낚시바늘에 어떤 물고기가 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낚시바늘 자체가 문제시 되는 것이다.

 

인식하지 않고는 어떤 사물도 구별할 수 없기에, 외로움의 반대말은 없다.

그래서 나는 외로울 때마다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안 외롭다."

 

이강하  ‡  <그리운 詩, 여행에서 만나다> 바람의 속도로 길을 걷다 中

 


02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철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이영광  ‡  사랑의 미안

 

 

03 풀밭 위의 식사를 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샀다. 이 두권때문에 잔뜩 들떴었는데 집에 와서 한 짓이란,

5회나 못봤던 파스타를 가슴 졸이며 보는 거였다. 그가 묻는다. 그렇게 재밌어? 이선균이 글케 좋아?

응 재밌어! 좋아! 소리만 벅벅 질르는데, 그래도 너무 좋아. 뱉어놓고 아차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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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0

    어머나. 이영광. 이영광. 이영광.
    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합니다.
    그 덥수룩한 얼굴이라니요. 그 사투리.. 다시 듣고 싶고요..
    그 음성.. 아, 정다운 음성과 수줍은 듯한 미소.

    아, 사랑의 미안은 처음 읽습니다. 최근 시인가요. 시가 좀 달라졌네요.
    참 반갑습니다. 좋은 시 올려줘서 고맙습니다. :)

    • addr | edit/del 서정적자아 2010.03.12 16:45

      그의 시는 좀.. 뜨겁다기 보다는..
      상처받은 곰이 쓴 것 같이..
      좀 처연하고.. 수더분하고 그랬는데..
      시가 좀 달라졌네요..
      근데. 참 좋네요. 그가 달라진 것이.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20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시를 보았습니다. 본래 어디에
      발표된 작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구요..
      저는 이 시를 보고서 이영광 이라는 시인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전작들을 찾아서 보게 된 케이스죠.

      아, 상처받은 곰이라니요..
      그의 전작들을 보며 떠올린 게
      덥수룩하고 수더분한.. 그런 이미지였는데
      아주 적합한 표현인듯 해요. 하하.
      이 시가 자아님께 기쁨이 된 것 같아서
      저두 흐뭇해요 :)

  2.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1

    박민규는... 늘 중반 이후에 흐지부지 되는 경향이 있어서 장편은 별로 안 좋아라해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2

      박민규는 단편이 너무 좋아요.
      이 책은 발췌된 문구를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좋아서
      충동 구매했어요. ㅋ

  3. addr | edit/del | reply 서정적자아 2010.03.12 16:46

    이영광에 흥분에 쭈르르 답글을 네개나 달다니. 흑.. 죄송합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2 17:10

      아하하. 아니에요, 죄송하긴요~
      반가운 걸요 :)

  4. addr | edit/del | reply ronyc 2010.03.15 13:03

    제게도 이선균은 '그 정도로 너무 좋다'고 외쳐도 당당히 좋은 이. ㅋㅋㅋㅋㅋ
    제 친구는 자꾸 이선균은 웃을 때 드러나는 선홍빛 잇몸이 지나치다며 제 사랑을 잡치네요. 뭘 모르는 것. 쳇.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5 20:46

      그렇잖아도 올리신 사진 보고 반가웠습니다. 히히.

      친구분께 제가 감히 이런 말씀 드리면 안되지만
      뭘 모르시는 군요. ㅋㅋㅋ
      그가 간간히 잇몸이 드러나게 웃는 날이면
      아, 온세상이 다 웃는 것 같아효 ㅋㅋㅋ

  5. addr | edit/del | reply 수은 2010.03.16 00:36

    언제 저도 모르게 텍큐의 블로그를 다시 여셨네요. :)
    하긴, 제가 텍큐에 근 한달 넘게 좀 소홀하긴 했져.
    전 완전, 박민규빠여요. 민규님은 모르시겠지만. 개인적으로 파반느는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하하하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16 13:07

      수은님의 포스팅을 무척 고대하는데
      목이 좀 늘어난 것 같긴 합니다. 히히.
      박민규빠가 제 주변에 은근 많군요!
      근데 저는 복면쓴 사진 보고 좀 식겁하였습니다.
      저는 좀 심약한 빠입니다 ㅋㅋㅋ
      파반느의 반응이 대체로 약하군요.
      어쩐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2010.01.24 20:20 from morceAu
 

01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까요, 공효진이 푸념을 했다.

 

그러자 마주 앉은 여자가 친절히 답해주었다. 그거, 물 맞거등.

그 순간 <파스타>를 끝까지 지켜보기로 결심하였다. 간만에 보는 명랑한 드라마.

미실을 떠나보낸 이후로, 기나긴 사극을 볼 지구력을 상실했다.


 

 

02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진은영  ‡  긴 손가락의 詩

 

근래에 알게 된 시인 중에서 무척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각별한 애착을 두지 않았던

진은영의 시들이, 부쩍 좋아진다.

 


 

03   오, 라는 외마디는 어쩜 이리 씨니컬하고도 호들갑스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폴의 노래 가사를 놓고, 네가 망친 폐허를 보렴, 오, 사랑, 이라고 장난쳤던 날이 생각나 마음깊이

반성했다. 그나저나 <여배우들>에서 오, 사랑이 흘러나왔던 그 타이밍은 참으로 뭉클하였다.

근데 분위기 깨서 정말 미안하지만, 중간에 가사 틀렸다, 가사 틀렸다,, 혼자서 막 이러고.


 

 

04   지난달 상선생님께서 음주 중에 그려주신 초상화는

 

배낭에 넣어둔 그대로 손바닥 만한 크기로 여러 번 접혀있다. 표구를 하려고 매번 마음먹지만

매번 그대로 접어둔다. 선생님, 이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표지로 써도 좋을법한 초상화예요,

라고 말한 것이 무척이나 민망하게 생각되어서. 낙관까지 찍어주신 그 그림을 쓰게 될 날이

오기는 올까. 추천하신『헤겔 미학』부터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05   왜 하필? 이라고 물은 사람, 현재까지 무려 3人.

 

듬직한 아이돌 다놔두고 왜 하필? 이라니! 오기가 발동한다.

그렇다면 더욱더 열렬히 사랑해주지.

나는 깝권이 좋다아~

 

 

 

06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궁극적으로 먹고 싶은 게 뭔데? 우습지 않은가, 돼지껍데기라니.

내 블로그의 이름은 궁극의 돼지껍데기야.

 

참 여지도 없으시지. 나는 지지않고 대들었다.

지금까지 선배 패러디 중에 최고로 모욕적이예요! 그러자 답이 왔다.

그게 바로, 기획의도야. 껄껄.

흥. 정말로 그런 블로그를 만들까봐 나 사실 살짝 쫄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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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01:55

    글쟁이들은 언제나 부러워요.
    왜냐하면, 글을 잘쓰니까요.
    또 왜냐하면, 흠.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6:26

      생략하신 두 번째 이유가
      몹시 궁금합니다.
      뭔가 반전이 있을 것 같은..

  2.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25 16:55

    두번째 이유는..(만족스러운 반전이 못될 것 같아 안타깝지만,)
    바로, ‘글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5 17:34

      아, 밥이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일로 생활을 유지해나간다는 것..
      갑자기 숙연해집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1.27 17:00

    진은영 님의 시. 가슴 한 구석이 '덜컹!'하네요.
    나도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이런 시를 써야지.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1

      다른 시들도 다 좋지만,
      그녀의 시론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내게서 가장 멀리 자라나있는 손가락의 끝으로
      아, 멋진 걸 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4. addr | edit/del | reply 고무풍선기린 2010.01.27 17:24

    '술은 물처럼 싱거운데, 내 인생은 왜 이리도 독한 걸 까요'
    그거 물이 맞거든 했지만,

    술일 때도 물처럼 싱거운 순간도 있잖아요.

    감정의 동요를 불러 일으키게 글 잘 쓰시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7 21:57

      에구, 과찬이세요.
      감정의 동요! 그런거 제가좀 좋아합니다 :)

      근데 정말로 술이 물처럼 싱거울 수가 있나요?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는ㅋㅋ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9 03:27

      아, 칭찬 감사합니다 :)
      한때는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말을 들을 때
      저말이 무슨 말일까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도둑이 제발 저리듯..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거나
      허황되게 꾸며댄다거나,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거나
      그런 의미로 들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에 와선
      진.심.으.로. 감사해요.
      저란사람이 뭔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은 끝까지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술이 싱겁게 느껴질 만큼
      쓰디쓴 인생의 맛을 알게 되더라도,
      감수성 있는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ㅎㅎ

    • addr | edit/del 고무풍선기린 2010.01.29 13:19

      정말 감수성이 풍부하신 것 같고,
      그 감수성이 글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래도 술의 쓴 맛을 느끼지 못할 떄가
      있었던 걸 보면,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싱겁다는 말은 과장일 테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