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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1.09 당신만 몰라

신경숙 냄새

2010. 1. 13. 23:49 from songErie

 

 

 

 

 

 

 

 

대학시절 한 친구로부터

노트를 쭈욱 찢어서 쓴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거기엔 좀 못생긴 글씨로 이렇게 써있었다

 

어쩐지,

신경숙 냄새가 나는

너.

 

(죄송합니다, 원문에 따라 존칭은 생략해요)

 

 

내가 이 문장을 잊지 못한 것은

명사형으로 끝나있는 그 짧은 편지를 버리지 못한 때문이고

그 편지를 못 버린 것은, 그때 내 위태로운 마음을 버티고 있던 것이

온전히 신경숙이라는 작가와 그가 쓴 '외딴 방'이라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지를 손에 들고 있던 그때의 기분이란

추종하는 작가에 대한 반가움이나 기쁨이 아니라

뭐라 답해야할지 모르겠는,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던 것 같다

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심약하며 쓸쓸한 스무살이라니,

그런 여자애에게서 나는 냄새라니...

 

설사 내가 그렇더라도, 잘 알지 못하는 누구에게

한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신경숙 냄새'에 대해서는 두번 다시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얘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애는 자퇴를 한뒤 홀연히 연락을 끊었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 녀석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복수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그거 모르지? 너한테서는 늘

이외수 냄새 났다!

 

(죄송합니다, 나쁜 뜻 아니에요 ^^)

 

어쨌든 그렇게 나를 떠난 그 친구 덕에

신경숙이라는 작가는 지금까지 내 큰언니처럼 내 이웃집 여자처럼

그렇게 내맘에 있다. 책을 낼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만나는 기분이었고

그시절의 나자신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강연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눌한 말솜씨에

오직 글로만 제대로 말하는 사람이어서, 기뻤고

평론가 남진우씨와의 결혼 소식을 접했을 때는 왜인지

그녀도 사람들이 다하는 결혼, 이란 걸 하는구나, 문화적 충격에 빠졌고

스승인 오규원 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눈이 붉고 야윈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는 그녀를 보며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간간히 신작들을 만나며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란

다만 그녀가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다

눈에 그늘이 있는 사람, 세상을 향해 별반 말이 없는 사람,

상처입은 누군가를 보듬느라, 세상의 밝은 쪽을 향해서는 언제나 등만 보이는 사람,

모든 등장인물에게 자기를 투영하는 사람

다소 자폐적으로 보이는 문학적 성향이

혹, 그녀의 육신을 병들게 하는 건 아닌지 지레 걱정을 하곤한다

 

그녀의 글을 오래 보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스무살에 느꼈던 그 감흥이 흐려지더라도, 더러는 실망하거나 아쉬움이 생기더라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보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없다면

'신경숙 냄새'를 풍기던 나란 아이도, 그때의 마음도

모두 다 흔적없이 휘발되고 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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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클리티에 2010.01.28 19:36

    고등학생 시절 외딴방을 절절히 읽고 나서 이 작가 특유의 회색빛이 좋았어요.
    좀 더 더하면 우울함에 죽을것 같고 좀 더 더하면 밝아져서 빛처럼 깨어질 것 같은 감성이랄까요. 담담하게 내면에게 묻고 답해나가는..

    작가 신경숙 님을 좋아해서 인지, 신경숙 냄새가 나는 슈풍크 님이 궁금해집니다..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29 03:14

      아, 회색빛. 생각하니 정말 그런 빛깔이 그려져요.
      흰벽 위에 생긴 그림자같은 회색빛이요.
      제가 이글을 썼던 이유, 그리고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뭔지 모를 그 냄새를 잃고 싶지 않아서, 일 거예요.
      어쩌면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에, 뒤돌아보는 건지도 모르구요.

  2. addr | edit/del | reply vomnoon★ 2010.03.24 01:25

    신경숙의 작품 중, <자거라, 내 슬픔아!> 와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어본 적이 있어요. 제가 떠올릴 수 있는 신경숙의 냄새는
    비오는 날에 비좁은 골방에서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이거나,
    오래된 책상에서 작가를 환기 시켜주는 매일 새롭고 반가운
    나무의 냄새이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치과에 갔을 때, 사람들과의 좋은 기억들만 떠올렸다는
    그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신경숙은 아마도 그런 좋은 기억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냥요. 갑자기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3.24 21:38

      그녀는 저에게 있어 아주 일관되게
      안타까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에요.
      바이올렛, 에는
      당신은 나를 잊었지? 라고 묻는 여자가 나오지요.
      그녀는 그런 사람 같아요.
      더 오래 더 많은 걸 기억하는 사람
      당신은 나를 잊었지? 라고 소리내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말하고. 그렇게 잊혀져가도
      대항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당신만 몰라

2010. 1. 9. 16:44 from paRamnésie

 

광막한 우주는 싫어, 너무 멀어서 내가 몇광년을 울어도 못들을 거잖아, 옹기종기 집들이

 

담을 맞댄 곳, 부디 새벽에는 떠들지 말아줘요, 나무 딱 한그루 심을 만한 뜰이 있었으면

 

하지만 넓은 방은 싫어, 폐쇄공포증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만 지붕이 낮고 좁은, 그러나 아늑한 곳

 

그래서 나는 여기가 좋았어, 근데 어쩌지, 자꾸 여기가 너무 외롭고 아프고 그래

 

무엇보다도 내가 이집에 가진 미련, 이웃들에게 가졌던 미련, 집은 무너져가는데

 

그런 것들은 여전히 지붕 위에서 거짓말처럼 빛나잖아, 어딘가 다른 곳으로 숨어버리고도 싶지만

 

알고있어, 이사갈 수도 없는 마음, 당신만 몰라. 이렇게 뜻없이 마음이 저리는 날에는

 

아주 멀리로 가서,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가서 나를 잊어버린 당신에게

 

보고싶다는 당혹스런 편지를 쓰고 싶은 거야, 우습게도 말이야,

 

 

 

-그곳을 떠나며

 

 

 

 

 

 

 

 

 

 

 

 

 

 

 

 

 

 

 

 

 

 

 

 

 

 

 

                                                                      오소영 - 그만 그 말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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