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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위의 수영장

2010.01.30 11:14 from songErie

 

 

 

 

 

 

 

 

 

 

 

 

 

 

 

 

 

 

 

 

 

 

 

비틀즈의 존재는 내 중딩 시절, 세상의 모든 음악이었다.

 

하루종일 다른 것은 들을 여력이 없을 만큼

비틀즈의 모든 음악을 찾아듣는 것은 내 즐거운 숙제였었다.

가사의 의미도 그땐 잘 몰랐지만, 수많은 곡들 중에 유난히도 좋아했던 fool on the hill.

그 어린 날에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던 인생의 허허로움 같은 것. 이 좋았고

중간에 리코더처럼 들리는 악기 소리는 뭉클했다.

아침에 들으면 싱그럽게 느껴지고 저녁에 들으면 괜시리 콧날이 시큰했던

내겐 참 이상한 노래.

 

시간이 흘러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같이 일하는 팀원들과

인터넷 까페 라는 걸 만들었을 때

나의 닉네임은 고민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fool on the hill 이 되었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사람은 자기도 비틀즈를 좋아한다고 누누히 말하더니

그 별명을 보고 떠억하니 적어놓은 문장이란

 

언덕위의 수영장님!  (허어억!)

 

fool을 pool로 착각할 수 있다는 건, 그렇다 쳐도

비틀즈 광팬이라며 호들갑떤건 무슨 얄팍한 구라였던가.

어이는 좀 없었지만, 언덕위의 수영장.. 이라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 라거나

세상 끝의 바다, 라거나 뭐 그런 신비한 것들을 상상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사람들은 나를 수영장,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저래봬도 술을 수영장에 대놓고 마신다느니 하는 장난스런 유언비어도 생겼는데,

그 말을 들은 모팀장은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집에서 수영장하셔?

어머나, 저는 평생 수영장이라는 데는 가본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자랑스럽게 말해드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수영을 못한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비틀즈를 미치게 좋아한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란 사람도 어느 면에선 낯설만큼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이 노래를 듣게 될 때,

잊고있던 그 시간, 오래된 별명을 떠올릴 때..

나는 그 허허롭고 고요하고 맑게 빛나는 언덕위의 수영장을,

거기 유유히 떠다니는 나를, 능숙하게 상상해낼 수 있다.

너는 '바보'가 아니야, 차라리 '수영장' 이라고 부를 께.

당신이 말해준 일도, 기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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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hoopoonk 트랙백 0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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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느림보 2010.01.30 12:30

    '허허롭고 고요하고 맑게 빝나는 언덕위의 수영장을, 거기 유유히 떠다니는'

    그래서 전 수영을 좋아합니다. 고요하고 차갑고 단순합니다. 들숨과 날숨. 팔과 다리의 반복 동작. 그 세계에는 저 밖에 존재하지 않죠. 물 속에서 땀이 날 정도로 수영을 하고 난 후의 상큰한 결락감 같은 것.

    p.s 참. 관심블로그 추가합니다. 제가 좀 많이 서툴고 낯을 가려서요. 오래 걸렸네요.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30 15:18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그속에 있군요. 들숨과 날숨,
      팔과 다리만으로 존재한다는 느낌, 뭔가 궁금해집니다.

      그리구 느림보님이시니깐요,
      느린 게 잘 어울려요 :)

  2. addr | edit/del | reply 꼬뮌 2010.01.30 20:16

    흠. 이거 무슨 앨범에 있는 곡인가여? 익숙한데 모르겠군여.

  3. addr | edit/del | reply Jooru 2010.01.31 06:12

    저도 비틀즈는 좋아합니다만.... 이 곡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들어본듯한 느낌만 있을 뿐.

    뭐. 제나이 또래는 비틀즈 음악을 잘 안듣긴 합니다만.

    • addr | edit/del 슈풍크 2010.01.31 10:56

      사실 비틀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심취해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제 또래에도.
      저한테는 음악을 막 접하던 시기였기에 의미가 남달랐지만,
      이미 오래전에 신화가 돼버린 사람들이니
      좋아한다, 안한다를 논하기에는 좀
      너무 큰 존재란 생각도 들어요.